부부가 서로에게 적응할 수 있었던 최고의 비결
30년 넘게 자기 방식대로 살아온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금방 적응하는 방법이 있을까?
혼인 신고를 하고 나흘 후에 남편이 먼저 보스턴에 갔다. 나는 서울에 남아 미국 비자를 받았다. 가만히 있어도 이마에 땀이 맺히는 8월.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뉴욕을 거쳐 보스턴 로건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심사대를 통과해 게이트에서 나오자, 그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오늘부터 저 남자랑 둘이 산다고?’ 이 상황이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잠깐 이제라도 도망갈까 고민했다.
그와 함께 탄 택시가 시내를 지나고, 다리를 건너 3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 앞에 도착했다. 남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깔끔한 로비가 나왔다. 도쿄와 뉴욕에서 지냈던 집보다 훨씬 쾌적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서 내렸더니 호텔 복도처럼 문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문을 여는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욕실과 부엌과 침실로 된 단순한 구조였다. 부엌과 침실 사이에는 가슴까지 오는 칸막이가 있었다. 미국에서는 이런 집을 스튜디오라고 부른다. 한국어로 하면 ‘단칸방’이다. 가구는 퀸사이즈 침대 하나, 나무 서랍장 하나, 접으면 1인용이 되었다가 펼치면 2인용이 되는 접이식 테이블이 전부였다. 집 크기에 비해 넓은 붙박이장이 있었다. 남편은 전날 업체를 불러서 청소했다고 말했다. 작지만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대충 먹은 탓에 배가 고팠다.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스무디를 사서 아파트에 딸린 작은 정원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먹었다. 오후의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강 건너 보스턴 시내가 보였다. 주변은 조용했다. 집에 들어와 침대에 손을 잡고 누워 그대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냉장고를 열었더니 아무것도 없었다. 서랍장 안도 텅 비었다. 남편은 5년 동안 한 번도 요리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는 보스턴에서 가장 번화한 뉴버리 스트리트에 갔다. 이런저런 가게에 들어가 냄비도 사고, 칼도 사고, 토마토 사고, 그릇도 샀다. 예전에 외국에서 혼자 살 때는 어차피 잠깐 쓰고 버릴 거란 생각에 무조건 싼 걸 샀었다. 이번에는 오랫동안 쓸 살림살이라 마음에 드는 걸로 세심하게 골랐다. ‘그토록 꿈꿨던 보스턴 새댁이 되었구나’ 신이 나서 이것저것 고르는 내 뒤를 남편이 쇼핑백을 들고 쫓아다녔다. 남자 혼자 살던 집이 2주 만에 제법 신혼집다워졌다.
그러나 신혼에 대한 환상은 생각보다 금방 깨졌다. 성인 둘이 작은 공간에 있으니 여러모로 불편했다. 가장 큰 문제는 남편의 코골이였다. 나는 누워서 잠이 들 때까지 한참이 걸렸다. 반대로 남편은 어디든 머리만 대면 순식간에 잠들었고 곧장 코를 심하게 곯았다. 당연히 옆에 있는 나는 잠들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남편의 코를 막거나 몸을 흔들어 깨우기도 했다. 그러면 그는 코를 골지 않으려고 옆으로 누워서 자는 등 신경 쓰다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일어나면 둘 다 눈 아래 다크서클이 까맣게 올라와 있었다. 결국 우리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해결법을 찾았다. 내가 먼저 잠들고 그다음에 남편이 자는 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 나는 설레는 마음에 일찍 일어나 씻었다. 옷을 골라 입고 화장하는데 15분 정도 걸렸다. 이어서 욕실에 들어간 남편은 20분이 넘었는데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얼른 나가고 싶어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좁은 방안을 서성거렸다. 마침내 남편이 수건으로 머리에 남아있는 물기를 털며 여유 있게 나왔다. 나는 그런 남편을 보자마자 쓴웃음을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야, 야, 빨래하냐?”
밖에 나오니 밤새 내린 눈이 발목까지 쌓여있었다. 하얀 눈이 덮인 케임브리지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여보, 저기 첨탑에 눈 쌓인 것 좀 봐요. 예쁘죠?” 나는 그의 팔짱을 끼고 걸으며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그런데 남편의 표정이 어두웠다. 우리는 일본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했다. 나는 모처럼 나왔는데 즐거워하지 않는 남편에게 서운했다. “여보, 무슨 일 있어요? 피곤해요?” 그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았어요.” “네? 내 가요? 언제요?” 그는 자기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내가 ‘야, 빨래하냐?’라고 한 것에 기분이 상했다고 했다. “사람마다 준비에 필요한 시간은 달라요. 상대의 다른 습관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가까운 관계일수록 고운 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편 말을 듣고 아차 싶었다. 나는 그가 이제까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또한 나는 평소 친한 사람에게 짓궂은 농담을 하거나 핀잔을 주는 버릇이 있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사람 사이에는 서로 존중하는 자세가 기본이다. 특히 말은 존중을 표현하는 강력한 도구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예의를 지키고, 소중한 사람일수록 예쁘게 말해야 마음이 전해지는 법이다.
우리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달랐다. 나는 내 기분과 생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반대로 남편은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데 서툴렀다. 나는 문제가 있으면 그때그때 해결하려고 하는 반면, 남편은 웬만한 일은 혼자 삭이고 그냥 넘어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살려면 상대방에게 자기 생각과 감정을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해와 서운함이 쌓이기 때문이다.
한 번은 한인 마트에서 한우를 사면서 돈만 내고 고기를 두고 왔다. 집에서 마트까지는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거리였다. “내가 계산하는 동안 당신이 쇼핑백을 챙겼어야죠!” 오랜만에 비싼 쇠고기를 먹을 생각에 한껏 들떠있던 나는 화나서 남편을 비난했다. “다음에 또 가면 되죠.” 그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돈이 아깝지도 않아요?!” 나는 그가 돈과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그가 나를 무시하고 대화를 피하려는 줄 알았다. “당연히 돈 아깝죠. 그런데 그 고기가 사람 마음보다 더 중요한가요?” 그가 물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내 감정에 빠져 남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니.
좁은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서로의 표정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는 잘 지내기 위해 상대방의 말에 더욱 신경을 썼다. 서로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갔다. 외출할 때는 남편이 먼저 일어나 준비했다. 자기 전에는 내가 먼저 서둘러 씻고 나서 남편이 천천히 씻었다. 잠들 때도 내가 먼저 잠들고 나면 남편이 뒤따라 잠자리에 들었다. 상대방이 좋아할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상대가 싫어할 행동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싸움이 일어나면 피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였다.
단칸방에서 살면서 두 가지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첫째,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거다. 타인이 나의 습관, 성격, 생각, 감정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배우자가 내가 원하는 걸 알아서 해줄 거라는 기대는 버릴수록 좋다. 대신,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내 뜻을 분명하고 부드럽게 전달하는 법을 연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문제를 더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다.
둘째, 자주 부딪칠수록 서로에게 더 빨리 적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방이 여러 개인 집에 살거나 가까운 곳에 가족이나 친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다툰 후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각자의 방에 들어가거나, 밖에서 누군가에게 하소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방도 없었고, 피할 곳도 없었다. 둘이 함께 살려면 어떻게든 빨리 대화하고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서로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결국, 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단칸방에서 신혼을 시작한 것이 십 년 동안 서로를 배려하는 부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