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니 마흔 살
눈을 떠보니 마흔 살 생일이었다. 정신없이 사는 사이에 십 년이 지나갔다.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뉴욕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세계 각국의 맛있는 음식을 맛보다 요리의 매력에 빠졌다. 어학 코스를 3개월 만에 그만두고 요리학교에 등록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뉴욕 레스토랑 위크 때 소호의 유명 레스토랑인 ‘머서 키친’에서 무급으로 일하며 디저트 만드는 법을 배웠다. 이후 박차를 가해, 명품 거리로 알려진 5번가에 있는 5성급 호텔 레스토랑 ‘더 마크’, 이어서 트럼프 호텔에 있는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 ‘장 조지’의 페이스트리 부서까지, 거의 1년 동안 쉬지 않고 일했다.
계속 미국에 살고 싶었지만, 함께 가정을 이룰 사람을 찾지 못하고 외로움과 고단한 생활에 지쳐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호텔이나 고급 레스토랑에 이력서를 내며 취업을 시도했지만, 나이가 많아서인지 경력이 충분하지 않아서인지 어디서도 연락을 받지 못했다. 물가가 비싼 뉴욕에서 생활하는 동안 모은 돈에 부모님의 도움까지 받았는데, 남편을 데리고 오겠다는 약속마저 지키지 못한 상황에서 부모님 눈치를 보며 용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귀국한 지 한 달 만에 요리 마케팅 회사에 취업했다. 내가 맡은 업무는 유명한 셰프를 강사로 섭외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테마의 요리 수업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거였다.
수강생 대부분이 직장인이었기 때문에 저녁 7시부터 수업을 시작하면 밤 11시가 다 되어 퇴근하는 날이 많았다. 주말에 하는 수업도 꽤 있었다. 일을 시작하고 3개월 동안은 수습 기간이라는 명목으로 월급을 다른 직원보다 70퍼센트만 주면서 수시로 야근을 시켰다. 삼십 대 중반의 남자 사장은 몇몇 직원만 불러 호텔에서 점심을 사주고, 여직원 한 명에게는 좋아한다며 고백까지 하는 별난 사람이었다.
이 회사를 계속 다닐지 고민하는 사이 3개월이 흘렀고, 정직원이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다음 날 월급을 받았을 때 통장에 들어온 액수가 평소보다 적었다. 사장이 광복절 공휴일에 쉰 수습 직원의 일당을 제하고 월급을 주라고 회계 직원에게 지시한 것이었다. 3개월 동안 초과 근무에 대한 수당은 한 푼도 더 주지 않았으면서, 전 직원이 쉬는 날 일하지 않은 수습 직원의 월급을 떼어먹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사장에게 따지고 회사를 나왔다.
일을 하면서 마케팅보다는 요리를 가르치는 데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요리 강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던 중, 요리 강사 A가 자신이 수업하는 것을 도와주면 내가 강사가 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구원의 손길인 줄 알고 덥석 그 손을 잡았지만, 알고 보니 마수였다. 그래도 8개월 동안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과 A의 수업을 보조하며 얻은 강의 경력을 바탕으로, 여러 문화센터에서 요리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1년 동안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요리를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갔다. 한편으로는 소개팅, 선, 가리지 않고 배우자를 찾아다녔다. 더 이상 어찌해야 할지 모르던 시점에 <시크릿>이라는 책을 읽고 ‘우주의 끌어당김의 법칙’에 빠졌다. 자기 최면에 가까운 긍정 요법을 실천하며 나를 가꾸기 시작했다. 헬스클럽에 등록해 퍼스널 트레이너의 지도를 받으며 새벽 운동을 시작했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해주는 책을 읽고, 교회에서 좋은 설교도 열심히 듣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다.
그렇게 딱 1년이 되었을 때, 기적처럼 보스턴의 한 대학에서 일하던 남편을 대학 동기의 남편 소개로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 딱 두 번 만나고, 가끔 문자를 주고받다가 전화 통화를 하면서 호감을 이어갔다. 5개월이 지난 후 벚꽃이 휘날리던 봄날, 서울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이미 서로에 대한 애정이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그에 힘입어 3주 만에 송파구청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정식 부부가 되었다. 이민 가방 하나 들고 남편이 살고 있던 단칸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돈에 쪼들렸지만, 때로는 소꿉장난하듯, 때로는 부딪치며 격하게 서로를 알아가고 맞춰갔다.
언젠가 보스턴에서 집도 사고 아이도 키우며 살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남편이 로드아일랜드 주에 있는 브라운 대학교에 교수 자리를 제안받으면서 우리는 이사했다. 아무도 모르는 동네에서 일 년 후 남자아이, 나단이를 출산했다. 주변에 가족도, 친척도 없어 남편과 둘이서 말 그대로 피똥을 싸가며 아이를 키웠다. 그 과정에서 산후우울증과 조울증도 겪었다. 나단이가 두 살이 될 즈음에는 학군이 좋은 교외에 정원이 딸린 작은 집도 샀다.
아이를 공립 유치원에 보내면서 이제 나도 좀 살겠다고 생각하던 때,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했다. 온 가족이 집에서 부대끼며 나는 마스크를 쓰고, 일회용 고무장갑까지 끼고, 손 세정제를 장착한 채 전투적으로 마트에서 장을 보고, 세끼 밥을 꼬박꼬박 차려냈다. 그렇게 1년쯤 지나던 어느 날, 갑자기 심한 복통을 느꼈다. 엑스레이, 캣 스캔, 헬리코박터균 검사, 대장내시경, 위내시경 등 10개월 동안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해봤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다. 결국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혼자 한국에 갔다. 서울에서 세 군데 병원을 돌아다니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사를 받았고, 심지어 뇌 MRI도 찍었다. 그럼에도 복통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인천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배가 아프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가족들은 배에 해충이 있었거나, 아니면 코로나블루가 아니겠냐며 저마다 추측성 진단을 내놓았다. 다행히 3년이 지난 지금도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다.
하루하루를 보내다 정신을 차려보니 마흔이 되었다. 문제는 결혼하던 날 상상했던 나의 모습과 실제 내 모습 사이에 큰 격차가 있다는 것이었다. 막연하게 나는 마흔 살이 되면 모든 면에서 안정되고 무엇보다 풍족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직업을 갖고, 돈도 벌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그저 미국 소도시에서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일 뿐이었다. 별로 가진 것도 없는데 나가는 돈은 얼마나 많은지. 딱히 무얼 사지도 않았는데, 모아놓은 돈도 없었다. 그야말로 한 것도 없이 나이만 먹었다는 생각에 급격하게 우울하고 불안해졌다.
그때부터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만약 남편이 아파서 일을 못 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나는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을까? 나단이를 혼자 키울 수 있을까?’ 답이 보이지 않았다. 한 달 넘게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설쳤다.
그러던 어느 늦은 밤, 잠든 나단이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이 아이만큼은 반드시 지켜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국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작은 습관부터 변화를 시작해야 했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단이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인터넷에서 ‘돈’, ‘부자’, ‘자수성가’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다가 켈리 최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부자가 되고 싶다면 책을 읽으세요”라고 말했다. 그 말은 뻔하게 들렸지만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 《부자의 속성》 등 10권의 책을 읽고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그으며 노트에 정리했다. 블로그에도 내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마주하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기로 결심했다. 불안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그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변해야 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성공한 사람들의 좋은 습관을 내 생활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일찍 일어나기, 독서하기, 기록하기, 산책하기, 검소하게 생활하기 등, 작은 변화에서부터 시작했다.
삶은 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나는 계획했던 것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배울 것이 많았다. 변화는 두려웠지만, 동시에 나를 성장시키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결국, 나 자신을 바꾸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내 삶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