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으로 와서 잘 살고 있다

날씨처럼 마음도 그래

by 요부마

"여보, 나 너무 우울해요."

"왜요?"

"그냥, 내가 이제까지 한 게 없는 거 같아요. 내가 쓸모없게 느껴져요."

"아니에요. 우리 진짜 잘해왔어요. 달랑 둘이 미국에 빈손으로 와서, 이렇게 잘 살고 있잖아요. "


감기 몸살로 앓다 보니, 우울하고 무기력해졌다.

가만히 있는데 눈물이 났다.

코를 훌쩍거리며 침대 맡에 앉아서 남편을 불렀다.

매트리스 모서리에 앉은 남편이 말했다.

우린 잘해왔다고. 미국에 빈손으로 와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고.

십 년 전, 보스턴 단칸방에서 시작했다.

생활비가 부족했다. 혼수나, 명품백을 사는 대신 먹고사는데 돈을 보탰다.

1년 후,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로 이사를 했다.

월세 1400불짜리 아파트였다.

방 두 개, 거실 하나, 작은 부엌 하나.

거기서 아들, 나단이를 낳고 키웠다.

아이가 크면서 안전하지 않은 동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다 아파트 단지에 살던 사람이 집에서 총을 맞아 사망했다. 마피아 조직원이었다고 한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이사를 결정했다.

5년 전,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다운타운에서 가깝고, 공립학교가 좋은 교외의 작은 도시다.

작은 주택이지만 손이 많이 간다. 더욱이 남편도 나도 서른 살 넘도록 한국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단독 주택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몰랐다.

그냥 살면서 몸으로 배웠다. 이제는 대충 안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새로운 사건이 생긴다. 그래도 어찌어찌 임기응변을 해나간다. 그렇게 십 년이다.


시간이 지난 지도 몰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버렸다.

나단이는 일곱 살이 되었다. 지난해부터 사립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부족하다. 빠듯하다...' 하면서도 아이한테는 다 해주고 싶은 한국 부모다.


지난날을 쭉 돌아보니, 남편 말이 맞는 듯싶다.

이 정도면 잘한 거다. 엄청난 성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해왔다. 남편은 얼굴에 세월이 느껴질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 먹고 싶은 거, 사 입고 싶은 거 참으면서 내 역할에 충실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다. 쓸모없는 사람도 아니다.

세상이 반짝거리게 보이는 기분 좋은 날이 있는 것처럼,

하얀 눈도 흐리게 보이게 마음이 가라앉는 날도 있는 거다.

날씨처럼. 마음도 그렇다.


뒷마당에 쌓인 눈을 밟아본다.

너구리, 토끼, 청설모, 다람쥐 발자국이 있다.

우리 집에 허락도 없이 세 들어 사는 동물 식구들이다. 문득, 동물들에게도 '기분'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냥 열심히, 활발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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