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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_저마다 어깨 위에 올려진 삶의 무게는 다르다

그 누구도 아픔의 크기를 비교하지 마라.

by 이은영


미국의 처세술 전문가 데일 카네기는 말했다.

나는 신발이 없음을 한탄했는데,
거리에서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났다.

예전의 나 역시 내가 가진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을 지닌 사람을 보며 위안을 얻곤 했다.


' 그래... 내 고통은 저 사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감정일 뿐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었다.

첫 번째 이유로는 사랑의 진리에 의해서다. 즉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을 축소시키는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된다.

두 번째 이유로는 자신보다 더 큰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을 보면 또다시 질투와 좌절감, 위화감을 품에 안고 휘청거리기 때문이다. 늘 타인과 비교하며 감정의 널뛰기를 하게 되면 쉽게 지친다. 행복과 불행의 기준을 외부환경에 두는 삶은 결코 평온함을 맛볼 수 없다. 눈과 귀에 들어오는 기준이 바뀔 때마다 수없이 흔들리며 방황하기 때문이다.


두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나고
자신의 한탄을 회개하며 걸어갈 때쯤
슈퍼카에서 내리는 명품 구두를 신은
또 다른 두발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의 너는 예전의 너보다
더 큰 열등감과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위와 반대로 상대의 아픔을 축소시킴으로써 자신의 아픔을 부각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부모님의 편애와 강압적인 교육방식에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말한다.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나는 부모 없이 자랐어."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말한다.

"웃기고 있네! 나는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꿈도 못 꿔봤어."

시험을 망쳤다며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누군가는 말한다.

"그깟 시험이 뭐가 대수라고 저 난리야! 난 등록금이 없어 학교도 못 다니고 일하고 있다고."


그들이 자신과 다른 상대의 아픔을 헤아려 줄 수 없는 이유는 여전히 자신의 상처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다. 자신의 아픔이 너무 크게 느껴져 타인의 아픔까지 헤아려줄 여력이 없는 것이다.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은 보듬어 토닥여줄 상태로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두고 '내면 아이'라 칭한다. 겉으로 보이는 몸은 다 성장했지만 내면의 자아는 그때의 상처에 머물러 여전히 방치된 채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적인 것만을 돌보며 채우느라 자신의 내면은 돌보지 않는다. 그로 인해 반복적으로 아픈 부위에 상처를 받고 힘들어한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내면 아이는 행복해지고 싶어 계속해서 자신을 돌보아 달라고 손길을 내민다. 그러나 우리들은 분노나 화, 불안과 질투 같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신호를 받는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에 외면한다. 부정적인 감정에 그대로 머무르며 상황과 상대를 탓하기 바쁘다. 마음속 원망이 커질수록 몸까지 함께 아프게 된다. 그렇게 무의식의 상처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런 자신의 내면 아이를 돌봐주며 건강하게 성장시켜줄 부모는 자기 자신이다.

2009년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한 친구에게 아픔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이렇게 위로해 주었다.

"은영아. 너도 정말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겠지만 내 아픔에 비하면 별거 아니야. 그러니깐 기운 내."

늘 곁에서 지켜보던 엄마도 위로해 주었다.

"한심한 것! 살다 보면 그보다 더 한일도 많아. 대수롭지 않은 그 정도 일로 힘들어하며 울지 마."

분명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날 위로하고 강하게 키우기 위해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 누구도 아픔의 크기를
비교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사건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정의 크기만큼 아픈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건이 있은 후 타인이 힘들다고 하소연 해올 때면 더 이상 사건의 크기를 경험에 비추어 바라보지 않았다. 사업실패든, 취업 실패든, 연애 실패든, 시험 실패든, 쇼핑 실패든, 그 일에 대해 얼마나 상처받고 괴로워하는지만 헤아렸다. 상대방 감정의 신음소리에만 귀 기울였다.

누군가는 100kg의 짐도 거뜬히 어깨에 짊어지고 살 수 있지만 누군가는 1kg의 짐도 간신히 들을까 말까 하다는 것을 매 순간 체험한다. 저마다의 어깨 위에 올려진 삶의 무게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들은 습관적으로 서로의 시련의 크기만 바라보고 비교한다. 그것을 견디어 내는 사람의 내면이 건장한 성인인지 성장하는 아이인지는 분별해내지 못한다. 그 결과 자신이 감당해 내는 시련의 크기로만 비교하며 "뭐! 그만한 일로." 라며 더 큰 상처를 주게 된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내용을 들었다.

"저는 제 눈앞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어요. 어린 시절 부모님 모두를 잃었죠. 그 충격과 아픔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별일 아닌 일로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만한 일로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상대의 아픔을 헤아려 줄 수 있는 공감능력은 자신이 얼마만큼의 시련을 겪어냈는가 와는 상관이 없다. 공감능력은 사랑으로 자신의 아픔을 극복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神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능력은 매일 새롭게 얻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상처받는 그 순간마다 외면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아픔을 극복해야지만 주변의 상처받은 사람의 아픔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 안의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얘야. 인간은 종종 상대의 슬픔에
무언가 위로의 말을 해줘야 한다는
유혹에 빠진단다.


귀로는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머리와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준비한다. 이러한 행동은 흡사 사랑의 마음과 비슷해 혼돈을 준다. 많은 사람들이 곧잘 이러한 유혹에 빠지는 이유란다. 하지만 그 실체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인간의 욕구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마음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불필요한 감정일 뿐이다. 네 앞에 있는 사람을 진정으로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싶다면 입이 아닌 귀를 열고 머리가 아닌 마음을 열어라.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며 함께 눈물 흘리는 사랑의 마음에 아픈 사람은 가장 큰 위로를 받는단다. 그러니 이 순간은 애써 위로의 말을 찾지 않아도 된다. 사랑의 마음 그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 안에는 인간보다 더 큰 신성神性이 있음을 기억하거라. 인간은 누구나 시련을 겪고 있는 자신의 감정에 귀 기울일 때 스스로 현명한 답을 찾아낼 수 있단다."








- GOOD BOOK과 이야기의 연결고리 -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 (코린토 1서 10,13)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하고 말하였다. (요한복음서 11,35-36)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이제 내가 너를 치유해 주겠다. (열왕기하 20,5)

*히즈키야가 이사야에게 물었다. "주님께서 나를 치유해 주시어 내가 사흘 안에 주님의 집에 올라갈 수 있으리라고 하셨는데, 그 표징이 무엇이오?" (열왕기하 20,8)

*너희는 어찌하여 아직도 지혜 없이 지내며 너희 영혼은 극심한 갈증에 시달리느냐? (집회서 51,24)

*지혜를 찾으려고 애간장을 태웠기에 나는 그 좋은 재산을 얻게 되었다. (집회서 51,21)

*너는 그 지혜에게서 마침내 안식을 얻고 그 지혜는 너에게 기쁨이 되어주리라. (집회서 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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