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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이미지를 위해 자신의 가치와 행복을 잃지 마라

가짜 자존심을 위해 진짜 자존심을 희생 제물로 바치지 마라

by 이은영


2011년 홀로 타고 다니던 차를 팔기 위해 내놓았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주차장에 세워 놓을지언정 팔지 말고 그냥 타고 다녀. 차라리 그만큼 더 벌기 위해 노력해. 지금 그 차 팔면 넌 전보다 못한 형편의 수준이 되는 거야. 주변 사람들이 널 보며 뭐라고 하겠어? 이은영 그 정도 형편도 안돼서 차까지 팔았다고 뒤에서 수군댈 거 아냐? 그 사람들한테 실패한 이미지로 보이고 싶어?

두려웠다. 그동안 날 부러워하던 사람들에게 실패한 이미지로 비칠까 봐. 자존심 강한 나는 그대로 마음을 바꿔 1년을 더 타고 다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1년을 더 주차장에 모셔 두었다. 신차를 뽑은지 3년이 넘었는데도 계기판에는 4,000km만 찍혀있을 뿐이었다.

당시 홈피스(홈 home+오피스 office 합성어) 생활을 했기에 차를 끌고 출퇴근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친구들을 만나도 서울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편했다. 주말 가족 나들이 때는 아버지 차를 타고 모두가 이동했다. 엄마 부동산 사무실에도 운영하는 차가 따로 있었고, 오빠도 분가해서 자기 소유 차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차를 팔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사업을 했기 때문에 자동차가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차 없는 나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싶지가 않아서였다. 그건 가난하고 실패한 인생의 상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얘야. 너는 너무나 많은 근심, 걱정을 하는구나. 남들에게 보이는 이미지를 신경 쓰느라 네 마음의 상태는 여전히 뒷전이구나.


진정한 자존심이란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도록
자신을 가치있게 여기며
존중하는 마음이란다.

많은 사람들이 진짜 자존심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채 가면을 쓰고 살아간단다. 그렇게 가짜 자존심을 위해 진짜 자존심을 제물로 바친다.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이 아닌 타인에게 보이는 삶을 살기 위해 저마다 연기를 하고 있단다. 세상은 그것을 가리켜 체면 또는 허세, 허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들이 건강한 자존감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기본 바닥이 된다면 말이다. 소중한 자신에게 행복보다는 공허한 감정만을 안겨줄 뿐이란다.


무엇보다 너 자신을 진리 안에서 진실되게 사랑해 주어라. 그것이 네 감정의 기본 바탕이 되어야만 한다. 그럴 때 허세와 체면 등이 인생에서 맛있는 양념처럼 제 맛을 내기 시작할 것이다. 네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을 괴롭히지 마라. 필요하다면 반드시 있어야 하겠지만, 필요하지도 않은데 부담까지 안겨주는 것들을 끌어안고 전전긍긍하지 마라. 차라리 네가 정말 원하는 차가 있다면 그 차를 타는 편이 현명한 행복이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이미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단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써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네가 너 자신의 삶을 어떻게 느끼느냐 이다.
남들에게 보이는 너를 꾸미느라
진정한 자신의 가치와 행복의 기쁨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2012년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차를 팔았다. 좋은 주인 만나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를 바라며 보내주었다. 훗날 내가 진정 원하는 차종을 구입해서 달릴 생각을 하니 오히려 설레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성적 기질이 강해 스포츠와 자동차를 굉장히 좋아했다. 초등학생 시절 근처 놀이동산에 가서도 레이싱 코스에 가서 경주를 했다. 대학생 시절 방학 때 제일 먼저 했던 것도 면허 취득이었다. 2종 오토는 성에 차지 않아 1종 트럭 시험을 치뤘고, 단 한 번에 합격함을 자랑으로 여겼다. 여전히 드라이브와 후진주차는 희열을 느끼게 하는 스트레스 해소 방법 중 하나이며, 카브리올레, 걸윙(gull-wing) 또는 시저도어(scissors door) 차량은 로망이다.

지금도 차가 필요한 날이면 아버지 차를 빌려 탄다. 그 차 역시 거의 지하주차장에 세워져 있다. 아버지는 평소 출퇴근을 사이클로 하시며 유치원에서 운영하는 차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해전 나는 남들에게 실패한 이미지로 비칠까 봐 경제적 낭비와 함께 보이지 않는 속앓이를 해야만 했다.


미국의 기업가이며 애플사의 창업자인 스티브잡스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도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느라 자기 삶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결과에 맞춰 살아야한다는 도그마에 빠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파묻혀, 여러분 내면의 소리를 잃지 마십시오.


행복한 천국의 삶이란 특정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삶을 타인이 휘두르지 않도록 지키는 힘이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가치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때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도그마(dogma)란 본래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이르는 표현으로 독단獨斷이라고도 해석한다. 18세기 이후부터 교회의 교리라는 고정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성서에도 예수님이 교회의 율법. 교리에 정면으로 대응하며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진리로 자유롭게 해방시켜 준다.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개성을 무시한 채 독단적 교리를 내세우며 사람들의 행복을 앗아가는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끊임없이 나무라는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반발하며 그를 죽이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행태는 교회 안에서도 세상 속에서도 반복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교리, 사회적 통념, 타인의 시선이라는 도그마에 발목이 잡혀 자신의 가치와 행복을 스스로 죽이고 있다.


얘야. 외부 환경은 매우 유동적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의 행복 기준점을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통념, 종교적 교리등에 두게 되면 결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게 될 것이다. 너는 지금부터 참사랑 그 진리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이 정말 무엇을 좋아하고, 어떠한 삶을 원하는지 차근차근 알아가거라. 그럴 때 비로소 올바른 자존감이 본바탕에 튼튼하게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때는 그 어떤 악의 유혹이 자신의 삶 안에 들어와도 결코 불행에 빠트리지 못한단다. 오히려 그러한 에피소드는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며 행복한 삶의 길잡이 역할이 되어줄 뿐이다.


남들에게 보이는 이미지를 위해
자신의 가치와 행복을 잃지 마라.
독자적 사고와 행동으로
자신의 행복을 지켜내어라.
그리하면 살아서 네 눈앞에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GOOD BOOK과 이야기의 연결고리 -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마태오 복음서 23,13)

*아침이 되자 모든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한 끝에, 그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 총독에게 넘겼다. (마태오 복음서 27,1-2)

*너희의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잡아 넘겨서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루카 복음서 21,16)

*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이사야 30,20)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 16,18)

*바오로가 땔감 한 다발을 모아 불 속에 넣자, 독사 한 마리가 열기 때문에 튀어나와 바오로의 손에 달라붙었다. 원주민들은 뱀이 바오로의 손에 매달린 것을 보고, "저 사람은 틀림없이 살인자다. 바다에서는 살아 나왔지만 정의의 여신이 그대로 살려 두지 않는 것이다."하고 서로 말하였다. 바오로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뱀을 불 속에 떨어 버렸다. 원주민들은 바오로의 몸이 부어오르거나 당장 쓰러져 죽으려니 하고 기다렸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며 지켜보았지만 그에게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생각을 바꾸어 바오로를 신이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28,3-6)

*독사의 이빨도 당신의 자녀들을 꺾지 못하였으니 당신의 자비가 도우러 내려와 그들을 고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혜서 16,10)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 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마태오 복음서 23,8)

*보십시오, 하느님은 당신 권능으로 숭고하신 분. 누가 그분 같은 스승이 될 수 있습니까? (욥기 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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