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저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 하겠다
구름에 달처럼 가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 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복효근, <목련 후기>
한때는 그랬다. 목련꽃 보다 동백의 순교가 멋진 이별이라 믿으며, 누구에게도 처량해 보이지 않기 위해 이별 앞에 괜찮은 척, 금세 아무는 상처를 희망했다. 그러나 희망처럼 된다면 그건 애초에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한 사람과 이별 하는데 내 반쪽이 떨어져 나가는 듯 아프지 않다면 그동안 두 사람이 만나 무얼 했다는 말인가? 시인의 말처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사랑했다면 이별 앞에서 cool 한 모습을 바라는 건 진정 cool 하지 못함의 방증이다.
‘헤어짐은 헤어짐다워야 한다. 오랜 사랑의 무게는 시간의 절약을 미덕으로 삼지 않는다. 안녕이라는 인사는 기능적이지만, 인사에 인사를 거듭하고 나서도, 적어도 동네 어귀까지 나가서 떠나는 이의 꼭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 흔드는 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참된 예의다. 그것이 작별이다.’라고 글쓴이는 말한다.
20대 유학 시절에 만나 5년을 사귀고 결혼을 약속했지만, 내가 먼저 이별을 선언하며 헤어진 사람이 있었다. 이별 앞에서 울며 매달리고 마음을 돌려보려 발을 동동거리던 그 사람의 모습이 영혼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사랑해본 사람은 안다. 누가 먼저 떠나고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다리는지는 진정 사랑했던 사이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칼날이 베고 간 자리에는 양쪽 다 상처가 남기 때문이다. 터져 나오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멋진 남자가 되어 내 앞에 다시 오겠다던 그 남자의 마지막 말을 무의식은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헤어지고 2년 뒤 다시 만나자고 편지를 썼을 때 답장없던 그였다. 대신 날 향한 마음을 신이 가져가버리신 것 같다는 대답을 했다. “그럼 우린 끝이야?”라고 물었을 때 그건 대답해 줄 수 없다던 그의 말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다.
‘아직 결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렇다면 이제는 내가 그의 꿈을 지지해주기 위한 협력자가 되어 다시 찾아가겠다.’
2년 전엔 내가 먼저 떠났지만, 어느새 나는 기약 없는 모습을 희망하며 ‘언젠가’라는 시간을 기다리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뒤로 꽤 오랜 세월이 흘렀고 그의 소식마저 끊겼을 때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민들레 홀씨처럼 언제가 그에게도 가닿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신의 계획은 여전히 인간이 예측 불가한 세계에 있었다.
어느 날, 지금까지 쓴 글을 우연히 읽은 한 남자가 봄날처럼 다가왔다. 그동안 살아온 모습을, 상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을 글을 통해 만나게 되었다. 그의 따뜻한 성품에 어느새 내 마음은 흔들렸고 진지하게 미래를 그릴 때, 가라앉아있던 무의식의 상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 아직 그에게 끝이라는 대답도 듣지 못했는데......’ 두려웠다. 모두에게 또다시 더 큰 상처를 주게 될까 봐. 여전히 멋진 남자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나기 위해 노력할 그 일지도, 아니면 새로운 여자 친구가 생겼을지도, 결혼했을지도 모르는 10년 전 그에게 확실한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현재의 남자친구를 곁에 두고 연락할 수는 없었다. 처지 바꿔 생각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양심의 가책 느끼지 말고 좋은 여자 있으면 만나. 오늘 마침표 찍은 거야. 그러니깐 우리 관계에 미련도 희망도 품지 말고 앞으로 좋은 인연 만들어. 그러고도 우리가 인연이라면 다시 만나겠지.” 10년 전 헤어진 그에게 그토록 듣고 싶은 말을 내 곁에 그에게 내뱉고 있었다. 결국, 과거의 상처에 발목 잡혀 현재의 남자에게 이별을 고했다. 또다시 어리석음의 반복에 똑같은 실수였다. 헤어지고 나서도 한참을 망설였다.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이제는 판단조차 서지 않았다. 부서져 내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신에게 묻고 또 물어 마음속에서 응답을 듣고 기록하며 실천했다.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어 상상치 못한 계획으로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이 앞서 그 길을 가신다. 편안하게 네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한 걸음 떨어져 제삼자의 눈으로 관찰하며 바라보라. 그 어떤 판단도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물이 흘러가고 바람이 불 듯이 삶을 대하라. 괜찮다. 이 또한 복음의 자산이 되게 하려는 신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너는 다시 나에게 의지하여 사랑의 시선으로 너 자신을 바라보아라. ○○(현재의 남자친구)는 걱정하지 마라. 진리로 이끄실 것이다. 지금은 △△(과거의 남자친구)를 위해 기도해 주어라. 그의 행복과 마음의 평온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 너의 생각과 지혜로 앞일을 내다보려 할수록 혼란만 가중되고 번뇌에 휩싸일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 의탁하고 맡겨라.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네 삶을 이끌어 주실 것이다.’
90일 동안 10년 전 헤어진 그의 행복을 위해 묵주 기도를 바친 후 용기 내어 연락했다.
나 : △△ 안녕! 나 은영이야~ 오랜만이지?
△△: 은영아 오랜만이네~ 잘 지내?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하게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10년 전 우린 이제 끝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을 비로소 듣게 되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