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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시작해야 사람이생겨나고이야기가흘러가고 의미가떠오른다

어쨌든 재미있는 일이다

by 이은영

"소설 잘 쓰네?" 아는 사람이 친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시작점에 그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소설의 사전적 의미는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이다. 고로 나는 소설이 아닌 수필을 쓰고 있었다는 건데, 나에 대해 알 리가 없는 그에게는 수필이 소설처럼 읽힌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테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우리 삶에는 일어난다. 하여, 읽거나 듣는 처지에서 믿기 어려워할 때, 쓰거나 말하는 처지에서는 고독해진다. 더 재미있는 건 고독 속에서 또다른 영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작가란 종족들은 누가 믿든 믿지 않든,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끊임없이 고독 속에서 기록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이상(理想)증세를 보인다. 흔한 예로 서기 2018년은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난 지 2018년이 지났다는 의미임을 학교에서 배운다. 그의 역사를 직접 보거나 체험한 다수의 사람이 쓴 글을 한 대 모은 것이 성경책-신약성경-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하며 진실이라 믿는 사람은 신도를 포함해서 그리 많지 않음이 현실이다.


마지막 독서 모임 책으로 ‘2018 제9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이 선정됐다. 혼자라면 존재 여부도 몰라 읽지 못했을 책일 텐데,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리다 보니 접하게 된 반가운 책이다. 총 7명의 작가가 쓴 7개의 소설이 등장하는데, 그 중 '더 인간적인 말'을 쓴 단발 파마를 한 정영수 작가는 작가 노트에 이런 말을 남겼다.


소설을 쓰면 더 그렇다. 처음엔 안 그랬는데 지금은 쓰기 시작할 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쓸지 거의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미리 생각한다고 그대로 흘러가지도 않을뿐더러 애초에 미리 생각하는 게 쉽지가 않다. 대개는 마음에 드는 문장을 먼저 쓰고 거기에 문장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그러다가 다시 쓰고 싶어지면(당연히 그런 상황은 매우 자주 발생하고)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하는데, 소설 한 편을 쓸 때 최소 서른 번은 다시 시작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도대체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가 없어져 버린다. '더 인간적인 말'에 변호사가 등장한 건 대략 열 번째로 다시 썼을 때였고, 이모가 안락사를 결심한 건 스무 번째쯤 되는 것 같다. 처음부터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다룰 마음은 없었고, 애초에 젊은 부부에 대해 쓸 생각도 없었는데 어쩌다가 거기까지 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쓰기 시작해야 사람이 생겨나고 이야기가 흘러가고 의미가 떠오른다는 건, 어쨌든 재미있는 일이다. (165 쪽)


소설을 쓰는 일과 세상을 사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다. 류시화 시인은 계획대로 살려는 인간을 보면 “어쭈. 인간 주제에 계획을 세워?”라고 신은 말할 것이라 했다. 제아무리 부와 권력을 양손에 쥔 사람이라 해도 계획대로 흘러가는 삶이란 그 어디에도 없다. 작가는 펜만 쥐면 자신이 상상하고 계획한 대로 종이 위에 창조주가 될 것 같은 기분에 곧잘 빠지곤 하지만, 시작하다 보면 그것마저 착각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배우게 된다.

소설이든 삶이든 어찌 되었건, 쓰기 시작해야-뭐라도 시작해야-그런 것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사람도 생겨나고 이야기도 흘러가고 의미도 떠오른다. 꼭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단순히 재미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재미있으니깐 할 수 있는 일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쁨과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알아주는 일은 고사하고 때론 상처 되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돈도 안 되는 글쓰기를 지속할 수 있을까? 7명의 젊은 작가들이-무명 시절에도-글쓰기를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철저한 고독 속에서 나름의 재미를 찾았기 때문일 거라 믿는다. 임성순 작가가 쓴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이라는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는 작가 노트에 이런 고백을 남겼다.


결과적으로 형과 문장웹진이 없었다면 쓰지 못했을 수도 있는 소설인 셈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문장웹진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운영합니다. 그 말은 방금 읽은 이 소설이 여러분들의 세금으로 쓰였다는 말이죠. ‘와! 세금을 받아 공포소설을 쓰다니, 이거 새로운 세금 도둑질인데!’ 당시에 이런 콧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마음으로 썼을 뿐인데 덜컥 ‘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다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88 쪽)


딩동! 2018년 8월 3일 진지해지려던 내 삶에도 그분이 찾아왔다. 성은 원이요 이름은 고료 씨. 그러하다. 바로 작가들이 글 쓰고 받는다는 원. 고. 료. 되시겠다. 7월 중순쯤 메일함을 열었더니 한 업체가 돈을 주고 내 글을 활용하고 싶다며 정중하게 다가왔다. 신종사기인 게 분명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언가 돈을 주고 사겠다는 것은 그만큼 상업적 가치가 있다는 뜻일 텐데, 그들이 지목한 글은 독후감 목적으로 쓴 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8할이 내 삶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긴 하지만) 그 글이 돈을 주고 살 만큼 상품성이 있는가 싶어 자신도 의아했고, 의문은 곧 의심으로 자라나 경계심이 됐다. ‘출판을 겨냥하거나, 작정하고 쓴 글이 아니라 그냥 편하게 의식의 흐름대로 쓴 글이 상업적 가치가 있다고?’ 손가락으로 갸름한 턱을 좌우로 문지르며, 눈을 가늘게 뜬 채 개인정보를 친절하게 제공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금 문제로 내 소중한 주민등록번호를 무려 13자리씩이나 요구했기 때문이다. (암요. 고료를 받았으면 세금을 내야 하고 말고요. 더 많은 세금을 내고 싶어요. 끼야호!) 때가 되면 모든 것은 이루어진다! 라는 약속을 믿고, 이미 되어있을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쯤되니 나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모르겠다.


태어나 누구나 한 번의 소설은 쓰는데 그건 바로 자기 삶의 이야기라는 말이 있다. 이 순간에도 소설 같은 삶을 살고 있음을 떠올리면 어깨 위에 올려진 삶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고, 진지했던 삶의 모습이 다소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을 쓰는 작가조차 자기가 쓰는 글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어떤 등장인물이 튀어나와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는데 하물며 인간의 삶은 오죽하랴. 그래서일까? 2년 전 소설인 줄 알고 다가왔다가 에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내 이름이 새겨진 몽블랑 펜을 선물했던 그에게 연락이 왔다. 오늘따라 기분이 샌치하다는 그의 인사에 10cm라는 고급 애드리브를 선사 후 이렇게 말을 이어나갔다. “인생 뭐 있어~ 그냥 재미있고, 감사하게 그렇게 경쾌하게 살다 가자! 우릴 위해 준비된 모든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깐 다시 으쌰으쌰하자 :)“

왼쪽 볼에 깊은 보조개가 파인 임현 작가는 ‘그들의 이해관계’라는 소설을 쓴 뒤 작가노트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매번 그렇듯, ‘그들의 이해관계’를 쓰는 동안에도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기를 바랐다. 그러고는 평소처럼 혼자 텔레비전을 보거나 양치질을 하거나 현관의 흐트러진 신발들을 정리하다가 가까운 빈벽에 대고 가만히 “너무 나 같다......”중얼거려주기를 기대했다. 어쩌면 누구 한 사람 정도에게는 그런 순간이 몹시 필요하지 않을까. 그게 별다른 이유 없이 지금을 조금 견디게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126~127 쪽)

그의 글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러니깐. 가장 먼저 나 자신이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쓰기에-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믿어주지 않아도-묵묵히 이 일을 하고 있지만, 누구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바람은 실제로 이루어졌고 감사 인사를 남기는 독자분들 덕분에 더 기쁘고, 감사하게 글을 쓰고 있다.

오래전 그날. 두려움이란 감정에 눌려 내면의 소리를 거부한 채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어도 안심할 수 있는 친밀감 또한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식도 재주도 없는 내가 글을 쓰면 과연 누가 읽겠냐며 시무룩해져 있을 때, 복음-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란 인간의 재주가 아닌 내 안의 사랑이 그 일을 하는 것이며, 사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사랑의 사람들을 보내주신다는 약속은 끊임없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 가톨릭 봉사단체에서, 브런치에서, 카카오스토리에서,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에서 만난 독자님들, 그리고 최근 독서 모임에서 만난 분들까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응원과 피드백을 주신다. 그때마다 당신께서 보내신 소중한 사람을 그냥 보내는 일 없이 내 안의 가장 좋은 열매, 생명의 양식을 주라는 말씀을 떠올린다. 그러면 다시 또 서툴지만 솔직한 나눔과 글을 쓰기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게 된다. 글을 씀으로써 사람들과 더 깊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은 신이 나를 위해 마련하신 선물이었다. 세상이 정한 틀이 아닌 마음의 소리를 따라 용기있게 행동할 때 우리 삶에는 좋은 사람이 생겨나고, 따뜻한 이야기가 흘러가며, 사랑의 의미가 관계 안에서 완성되어간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은 지금도 삶속에서 탄생하며 자신을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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