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이야기를 완성하면 글이 된다.
2015년 10월 친척들과 캠핑을 하러 갔다. 아람단 단장이었던 오빠를 따라 입단했다가 부단장까지 해먹은 실력을 발휘해, 대형 텐트 2개에 가림막까지 뚝딱 설치했다. 그렇게 호기로웠던 캠핑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캠핑의 꽃은 역시 캠프파이어와 진실게임 아니던가. 우리는 음악을 틀어놓고 캔 맥주를 마시며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았다. 흘러나오는 노랫말과 비슷한 경험들을 이야기하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의 글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노랫말과 연관성 따윈 없었다. 영화 ‘캐빈에 대하여’의 캐빈이 총기 난사 전, 양쪽 문을 걸어 잠그고 “It’s show time!”을 외치던 장면 같았다. 이번에도 빠져나갈 구멍은 어디에도 없었다. 먼저 왼쪽에서 총성이 울렸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줄게. 일단 은영이 너는 글 쓰는 재능이 없다는 게 문제야! 글 잘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네 실력으로 무슨 글을 쓰겠다는 거야. 게다가 넌 글을 쓰는 거를 너무 우습게 알아. 도전은 좋은 거지만 결과는 좋지 않을 거야. 그러니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리고 일기는 일장에나 쓰도록 해.”
어느 날 글이 너무나 쓰고 싶었다던 그는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서울예대 극작과에 입학한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교수들에게도 기대주로 손꼽히며 승승장구 하였지만, 진짜 글쟁이들을 보며 우물 안의 개구리였음을 자각하곤 절필한다. 그런 화려한 과거가 있던 그가_’글을 쓰는 순간부터 위대한 작가는 탄생한다. 그러므로 나는 글을 쓰는 이 순간부터 위대한 작가다.’라는 신념으로_꾸준히 글을 쓰던 내게 한 말이었다.
그다음 오른쪽에서 총성이 울렸다.
“난 언니 글을 읽으면 솔직히 ‘지랄하네’라는 생각이 들어. (왓?) 돈 때문에 걱정해본 적이 없으니깐 그런 말도 쉽게 하는 거야.”
걱정을 가장한 무례함과 평가로 포장한 자기 분노는 어두운 밤하늘의 별들을 배경 삼아 날아다녔다.오랫동안 이보다 더 독한 반응에 훈련되어 온 덕분일까? 아니면 태생이 뻔뻔해서일까? 이유야 어찌 되었건 생명을 위협하는 명중은 없었다. 대신 내 안에서 한 말씀이 떠올랐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행전 5,41)
“형부 말이 옳아요. 나는 글 쓰는 재능이 없어요. 그랬기에 재능을 믿고 글을 써서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다행히도 난 내 재능을 믿고 글을 쓰는 게 아니에요. 일상에서 들려오는 신의 음성 (사랑의 가르침)을 기록하는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하며 글을 쓰고 있어요. 아니. 그냥 받아 적는다는 표현이 나에겐 더 어울리는지도 모르죠. 그러니깐 내가 글 쓰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신의 충직한 도구가 되는 일에 방해가 될 뿐이에요.”
시선을 돌려 사촌 동생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내 글을 읽고 지랄한다고 느낄 수 있어. (킥복싱을 배워 한 판 뜰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우린 서로의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으니깐 네 감정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 설령 이해한다고 말해도 그것조차 내 처지에서 상상한 내 감정이지 진짜 네 감정은 아닐 테니깐.
그래서 내 입장에서 바라볼 땐 돈 때문에 힘들게 고생해 본 사람은 돈 없는 게 가장 힘든 일이라고 믿고 사는 것 같아.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동안 삶에서 돈 문제가 가장 힘든 일이었을 테니깐. 내가 2009년에 감정의 밑바닥을 찍으면서 배운 것 중의 하나가, 저마다 어깨 위에 올려진 삶의 무게는 다르다는 거야. 그러니 너 말대로 누군가는 돈 걱정은 안 하고 살겠지만, 그 외의 다른 문제로 엄청 힘들어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대화할 수 있어. 물론 상대방의 고민이 철이 없거나 자신의 고통보다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하지만 아픔의 크기는 객관적인 사건의 크기와 비례하지 않아. 그 사람이 그 사건으로 얼마나 아팠느냐에 따른 주관적인 문제지. 원래 사람은 타인의 총상보다 자기 손끝의 가시가 더 아픈 법이잖아.
(중간 생략)
다들 고마워.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이야기해줘서. 가족 아니면 누가 이 정도로 내 글에 대해 자기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겠어. (웃음) 그래서 나는 지금 상황이 매우 기쁘고, 감사해. 훗날 후배들에게 그리고 대중 앞에서 에피소드로 들려줄 멋진 이야기가 탄생했으니까. “
순간의 적막을 깨며 사촌 언니가 마지막 총성을 울렸다.
“와! 얘랑은 진짜 말이 안 통하네! 분명히 우린 다 똑같은 한국말을 하고 있는데, 은영이랑은 캐나다에서 온 외국인이나 뚫리지 않는 딱딱한 시멘트벽이랑 이야기하는 거 같아. (일동 웃음) 은영이 쟨 진짜 애가 특이하달까? 암튼 어렸을 때부터 좀 이상해. 쟤가 무슨 말 하는지 이해되는 사람 손들어봐. 난 진짜 이해가 안 돼.”
그 일이 있은 지 일 년 후. 자신의 또 다른 고통을 통해 그동안 내가 하던 말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며, 사촌 동생으로부터 장문의 카톡이 날아왔다. 당시 어리석고 무례한 말에도 화내지 않고 차분하게 이야기 해준 게 두고두고 떠올라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누군가에게 잊지 않고 사과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사촌 동생의 언행이 근사해 보였다. (그래서 킥복싱을 배우지 않았다)
형부는 그 후로 카카오 스토리에 전체 공개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한동안 자신의 글에는 평가 금지라는 푯말을 걸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2017년이 되던 해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언젠가 가족 캠핑을 갔을 때 제 글에 최악의 점수를 주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ㅋㅋㅋㅋ 사람들에게 욕먹을 각오를 하고 쓸 때 작가는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을 글로 표현할 수 있고 내공도 그만큼 단단해지잖아요. 그걸 견뎌낼 용기가 없다면 비밀 일기나 써야죠 :) 바이블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듣기 좋은 평가만 하지는 않잖아요~* 우리 모두 홧팅!
처음에는 형부라는 사람이 굳이 왜 저런 악담을 나에게 퍼붓는가 싶었다. 속상하고 화나고, 어이가 없고, 이해가 안 되니 미워지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안의 사랑, 내면의 소리에 집중했다.
“사랑하는 얘야. 누군가 네게 하는 말을 듣고 기분이 몹시 상했다면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을 기억했으면 좋겠구나. 그 사람의 말들은 너에게 말하기 전 자기 자신에게 쏟아냈던 신념의 되풀이이며 자기암시일 뿐이다.
기억해라. 누구를 만나든지 네게 하는 언행을 통해 상대방의 삶과 가치관과 신념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란다. 자신을 올바로 믿고 사랑해주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올바로 믿고 사랑해주지 못하는 법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신념과 경험에 따라 말하고 믿고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간단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성경 속 비유를 기억하거라. 함께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사랑의 시선으로 세상 만물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자. 참사랑을 알고 배워 실천하기 전과 후의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네 앞에 존재할 것이다.
사랑하는 내 아이야. 언제 어디서든 자기 자신을 올바로 믿고 사랑해 주어라. 자기 자신에 대한 삶의 태도가 타인을 대하는 언행이 되어 세상을 움직여 가기 때문이다.“
한동안 형부는 내가 글 쓰는 일을 포기하길 바라는 사람처럼 굴었다. 글재주가 없다고 말하는건 기본이고, 쉽게 글 쓰지 말라며 화를 내거나, 글을 제대로 쓰고 싶으면 자신처럼 서울예대 극작과에 합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형부를 바라보며 기도하기를 몇 개월째 내면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실패하거나 포기한 후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니? 바로 자신이 실패하고 포기한 일을 누군가 옆에서 성공시키는 일이란다. 그래서 상대방도 자신처럼 실패하거나 포기하길 바라게 되지. 왜냐하면 그래야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해 자신이 초라하거나 못난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란다.
사랑하는 내 아이야. 무슨 일이든 너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일을 하기보다, 네 안에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일을 하는 편이 좋단다. 왜냐하면 때로는 네가 실패하거나 포기한 일을 옆에서 성공시킬 때에도, 자신을 한결같이 사랑하면서 성공을 두고 함께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형부는 실패하고 꿈을 포기하며 상처받았던 과거의 자신을 돌보며 사랑해주지 않았다. 그 결과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나를 보며 과거 자신에게 했던 모진 말들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와 너를 이해할 때 마음에서부터 좋은 말과 글이 나온다는 것을 2015년의 우리들을 통해 배웠다. 역시 가족의 인연을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신이 서로에게 보내준 천사임이 틀림없다.
그 일이 있고 2년 후. 형부는 내게 사과와 응원의 메시지도 함께 보내왔다.
얼마 전 한 집안의 가장으로 마음껏 글을 쓸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을 한탄하는 형부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형부가 글을 쓰는 일을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상황과 경험들은 형부만 쓸 수 있는 글의 소재가 될 거에요. 나는 그런 글을 쓸 수 없어요. 쓴다 해도 상상일 뿐 직접 경험한 사람과는 글의 힘이 달라요. 그러니깐 지금 힘든 일, 감정들 다 기억하며 묘사해봐요. 형부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공감대를 형성하며 또 다른 힘과 위로가 되어줄 거에요.”
그렇게 우리들은 여전히 좋은 친구이자 가족으로 서로의 성장을 위해 묵묵히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전 김대중 대통령과 故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었던 강원국 작가는 2018년 신작 ‘강원국의 글쓰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글도 잘 쓴다. 내 글의 가치를 남의 평가에서 찾지 말고 스스로 대견해 하자. 나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내 안의 나를 꺼내 쓸 수 있겠는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며 누구에게 관심이 있겠는가.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자신을 토닥여줘야 한다. ‘그럴 수 있다. 누구나 그런다.’ 그러다가 한 줄 내디디면 ‘고생했어. 대단해. 지금처럼만 해.’ 수시로 칭찬하고 고무하자. 뇌는 칭찬받는 짜릿함을 기억해뒀다 다시 그것을 느끼기 위해 시도한다. 마치 술 취했을 때 기분 좋음을 다시 느끼기 위해 술을 마시듯. 난 그렇게 살기로 했다.' (34쪽)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을 흔히 자존감이 높다고 표현한다. 지식백과를 찾아보면 자존감이란 (self-esteem) 자신에 대한 존엄성이 타인들의 외적인 인정이나 칭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 내부의 성숙한 사고와 가치에 의해 얻어지는 개인의 의식을 말한다. 따라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외적인 인정이나 칭찬이 없어도, 오히려 비난을 받을 때도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간다. 하여,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글도 잘 쓴다는 강원국 작가의 말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엄청난 필력을 갖추었다고 해석되기보다,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쓸 힘이라고 풀이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며 계속 쓸 힘을 내면에 소유한 사람이 결국에는 엄청난 필력까지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야고보서 5,11)
하늘이 내려주신 재능이라 불리는 천재 또는 역사에 기록되는 인물은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가 아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과 믿음으로 마침내 자기 몫을 해내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기로 했다.
강원국 작가는 신경정신과에서 강박증 치료를 받은 자신만의 경험으로 이런 글을 썼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기억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알아채기가 어렵다. 그것을 잘 알아채는 사람이 글을 잘 쓴다. 시인이 그렇고 소설가가 그렇다.
저마다 자기 안에는 내가 모르는 내가 존재한다. 바로 그 사람을 불러내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내 안의 이야기를 완성하면 글이 된다. 그런 글은 배움의 깊이와 관계없이 누구나 쓸 수 있다.' (198~199쪽)
성경에서 신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큰 계명, 세대와 국경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진리는 이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복음서 15,12)
지금까지 독서모임에서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 앞에서 내 이야기를 진솔하게 꺼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높은 자존감 덕분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신이 나를 사랑한 것처럼 부족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나 자신을 사랑한 것처럼 부족한 타인도 사랑하고자 하는 그 마음 하나가 오늘의 내 모습을 만들었다. (주변 역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으로 채워가는 중이다)
지금처럼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사랑의 음성이 이끄는대로 살아간다면, 신이 나를 위해 계획하고 마련하신 역사를 보고, 듣고, 느끼며 살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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