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1부. 나이란 무엇인가? _일상에서
오래전 열일곱 살 아이에게 새해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소년은 대답했다. “열여덟 살이 되는 것입니다.” 소년의 대답은 도끼가 되어 내 심장을 내리찍었다. 보이지 않는 도끼에 찍혔기에 뽑을 수도 없는 상태로 지금도 붉은 피를 내 뿜고 있다. 반면, 당시의 소년은 차분한 모습으로 하얀 환자복을 입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불치병을 앓고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사실,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이다. 잘생겼든 못생겼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착하든 못됐든 상관없이 언젠가 죽는다. 게다가 죽는 순서도 없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의 병문안을 와서 통곡하던 친구가,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죽음은 복불복이다. 그 점에 있어서 죽음이란 신이 발명한 가장 기발하고 공평한 일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고, 상처 입고, 그러다가 결국 자기 주변 사람의 죽음을 알게 된다. 인간의 유한함을 알게 되는 이러한 성장 과정은 무시무시한 것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확장된 시야는 삶이라는 이름의 전함을 관조할 수 있게 해준다. 그 관조 속에서 상처 입은 삶조차 비로소 심미적인 향유의 대상이 된다. 이 아름다움의 향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시야의 확대와 상처의 존재다. ( p.37)
한국은 유독 나이에 민감하고, 나이 많음을 놀리며, 나이 들어감을 수치로 여기는 문화가 있다. 그리고 20대도, 30대도, 40대도 모두 자신의 나이가 많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지는 여전히 모르겠으나 나도 소년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 병든 문화에 젖어있었다. 사실 요즘도 호감없는 사람 앞에서는 우리의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는 말에 동의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그러면 사람들과 마찰음을 줄일 수 있기도 하거니와, 후배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젊음에 대한 우월감을, 나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이에게는 값싼 희열의 감각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글감을 만든다. ‘당신 역시 운이 좋아서 지금 놀리는 우리의 나이까지 건강하게 살아 있길 바랍니다. 다만, 우월감과 열등감은 백지 한 장 차이로 양면성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놀리던 나이가 되면, 젊음에 대한 한없는 동경과 좌절과 열등감에 휘둘릴 것이니, 지금부터 연륜의 지혜에 초점을 맞춰, 견고한 정신과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우리는 소나기로부터 배울 것이 있지. 소나기를 만났을 때 젖지 않으려 빨리 뛰어가곤 하지만 결국 젖기 마련이지. 처음부터 젖을 각오를 하고 있으면, 젖더라도 적어도 당황하지는 않는다. (P.301)
며칠 전 한복을 입고 불혹 잔치를 했다며 사진을 보여주던 친구와 나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이 들어가는 건 축복이야. 살아 있다면 당연히 나이 들어 가는 건데 그게 왜 수치고 놀림거리가 되어야 하지? 나이 먹고 늙는 게 싫다면 죽으면 돼.” 나의 표현이 너무 극단적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 그런 생각 때문에 죽은 모델이 있다. 가장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다며 이십대의 나이에 그녀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선택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옳은 건지, 그른 건지에 대해 논할 만큼 나는 인생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저 운명이 허락하는 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수많은 감정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죽어가고 싶다. 때론 사는 게 너무 괴로워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런데도 다시 죽도록 살고 싶다.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는, "삶이 진행되는 동안은 삶의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죽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몽타주는 필름에 대해 죽음이 삶에 행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라고 말했다.
하여, 살아있는 것은 모두 죽어가는 것임을, 나이 들어감은 죽어가는 존재의 특권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죽어갈 것인지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삶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좋다.
“또 한 해가 가고 오네요.”
“당신 나이가 되면 모든 게 선명해질까요?”
“아니요.”
“그럼 더 혼돈스러워지나요?”
“그냥 빨리 흘러가요. 비 많이 왔을 때 흙탕물처럼.” (p.27)
진행되는 동안은 무슨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 모른다. 때로는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파국을 걱정하느라 목전의 즐거움을 놓쳐버리기도 한다. 미래에 대해 불안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의심스러운 나머지, 젊음이라는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버리도록 바라보고만 있기도 한다. (P.134)
2부. 배움이란 무엇인가?_학교에서
나는 학교에서 흔히 문제아로 불리는 아이였다. 그렇다고 비행 청소년은 아니고 순종적이지 않고 늘 “선생님 왜요? 왜 그래야 하는 거예요?”라고 질문을 해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왜 여학생은 머리를 귀밑 3cm로 유지해야 하는지에 의문을 품고 쇼트커트를 하고 등교한다든지, 왜 흰색 운동화만 신어야 하는지 의문을 품고 검정 운동화를 신고 등교한다든지, 왜 비치는 스타킹은 신어서는 안 되는지, 왜 머리에 핀을 꽂아서는 안 되는지, 왜 머리에 젤을 발라서는 안되는지, 왜 색깔 있는 속옷은 입어서는 안 되는지 하는 것들에 의문을 품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도전했다. 대부분의 선생님은 그런 질문과 도전을 귀찮아했고 싫어하셨다.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왜 토를 다느냐였다. 학생과 대화가 아닌 언제나 일방적인 그들의 권위적 태도에 나는 분노했고, 반항했다.
'이건 마크 타이슨의 말이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P.312)
그러다가 드디어 일이 터졌다. 가정 시간에 선생님께서 나에게 화가 단단히 나신 것이다. 중 2병에 걸린 나를 교탁 앞으로 부르고 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혼내셨다. 나는 고개를 떨구는 대신 그런 선생님의 눈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선생님은 넌 공부할 가치가 없는 아이라면서 다음 수업을 듣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교무실로 끌고 가 문을 걸어 잠그셨다. 그런 후 잘 못 했다고 한마디만 하면 회초리 백대를 때리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잘 못 한 게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씀드릴 수 없으니, 그냥 백대를 때리시라고 말했다. 가정 선생님은 기가 차 하시더니, 내가 맞는 도중에 무릎을 굽히거나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처음부터 다시 숫자를 세고 때린다고 하셨다. 그렇게 칠십 대 넘게 맞으면서도 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손은 떨리기 시작했고 심호흡과 함께 탁자 위에 회초리를 올려놓으셨다. 그리고는 교직 생활 평생 나 같은 학생은 처음 본다면 크면 뭐라도 되긴 되겠다고 하셨다. 그 일이 있고부터였다. 주변 선생님들이 나를 혼내려고 하면 '이방인'의 뫼르소 친구처럼 앞장서서 두둔하며 은영이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며 변호해주셨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장점을 찾아 칭찬해 주셨다. 덕분에 나는 지금도 바느질을 잘한다. 패션 업계에 근무할 때도 그때 배운 야무진 손끝은 빛을 발했다. 그렇게 가정 선생님의 칭찬과 기대대로 세상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꿈꾸고 바라는 내가 될 수 있었다.
어쨌거나 학창 생활이라는 것이 그렇게 귀중한 자원을 소비하는 일이라면, 그에 대한 평가의 시간을 갖는 것이 당연합니다. 각자 자기 식대로 고유하게 학창 시절을 보냈을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평가는 개개인의 몫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평가 기준에 대한 것입니다. 과연 어떤 기준으로 지나온 학창 생활을 평가할 것인가? 학교 졸업 후 얼마나 높은 연봉의 안정된 직장을 가지게 되었는가가 유일한 기준은 아닙니다. 중요한 평가의 기준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현실 사회에서 타인과 사는 일의 고통과 영광을 얼마나 잘 겪을 마음의 준비, 즉 정치적 덕성을 습득했느냐는 것입니다. 즉 얼마나 성숙한 정치 주체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 졸업생들이 염두에 둘 만한 평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제가 보기에 보다 근본적인 평가 기준은, 누가 좋은 인생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좋은 이야기일까요?
(p.114~115)
그는 "인간이 평생 다만 목숨을 부지하는 데 급급하면 불행해지기 쉽다. 살아남는 게 직업이 되면 안 되는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적잖은 사람이 그런 지경에 몰리고있다. 이때 정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p.336)
3부. 인간관계란 무엇인가?_사회에서
누군가 그랬다. “네가 인생을 좀 더 즐겁게 살려면 현재 속해 있는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라고.” 그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김영민 교수의 말은 더욱 옳다.
아, 실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 사랑을 통해서 인생의 권태를 이겨내고, 사랑의 상상 속에서 협애 한 자아를 넘어 보다 확장된 삶을 경험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인간들은 대부분 사랑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 누추하다. 깔끔한 용모는커녕, 화장실에서 손도 씻지 않는 존재들도 적지 않다. (p.162)
그러하다. 있는 그대로 누군가를 사랑하기엔 그들은 너무 누추하고, 못생기고, 어리석고, 교만하고, 게으르고, 비겁하고, 이기적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제법 괜찮은 인간이라 착각까지 하며 살아간다. 그런 인간을 사랑하고 또 그런 인간으로부터 사랑받기엔 나도 너무 똑같아서 사랑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살기 위해 사랑해야 한다.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인간관계 안에서 사랑의 기술, 삶의 기술을 터득하는 중이다.
인간이 구원되었다, 행복하다, 라고 말할 때는, 많은 경우, 대상으로부터 자신이 거리를 유지할 때라기보다는, 기꺼이 스스로 목매고 싶은, 스스로 그것 때문에 부자유스러워지고 싶은 어떤 대상을 찾은 경우다. 고전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사랑인 셈이다. 그 사랑의 대상이 신이든, 어떤 대의든, 연인이든 간에. 그래서일까? 한니발은 스탈링을 사랑한다. (P.276)
아무 일도 기억나지 않는 삶은 물론 지루한 이야기겠지요. 그래서 용기와 도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P.116)
내게 주어진 삶을 만끽하기 위해선 반드시 내가 사는 곳에서 사랑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 앞에 있는 당신을 바라본다. 소유하지 않은 채, 미래의 기대도 희망도 없이 지금의 존재 자체로 고마워하고 사랑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당신도 느낄 수 있도록 집중하면서 말이다. 누추하고, 못생기고, 어리석고, 교만하고, 게으르고, 비겁하고, 이기적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다니 그거야말로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 아닌가 하고 위로하면서 말이다.
"우리의 차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궁극적으로 지니고 살아야 하는 고독과 이웃하고 있으며, 각자 자신의 고독을 확립해야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적어도 나는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P.147)
아무리 부부지만 상대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기 바랍니다. 특히 각자, 상대가 모르는 외로운 전투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배우자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외로운 싸움을 혼자 수행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주기 바랍니다. 그래서 외로운 전투 중인 상대를 되도록이면 따뜻하게 대해주기 바랍니다. (P. 47)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예술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장소가 일상임을 아는 사람이다. (중략) 세상과의 불화 속에서 예술을 통해 독립된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세상에 복수하고 있는 많은 예술가들의 모습을 닮았다. (p.292~293)
위대한 예술가 반 고흐도 말했다. '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예술은 없다고 생각한다.'
4부. [북씨-플릭스] 파트너란 무엇인가?_영화에서
얼마 전 [북씨-플릭스] 파트너를 맡아서 해볼 생각이 없느냐며 독서 모임 트레바리 크루에게 톡이 왔다. (넥플리스 영화와 어울리는 책을 함께 보며 독후감을 쓰고 토론하는 모임이다) 나는 진지하고 신중하게 육십초 생각하고 하겠다고 했다. 원래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을 좋아해서라고 쓰지만 사실 머리가 좋지 않아 양다리가 안 되는데, 어디 한번 멋지게 망쳐보자는 도전 정신으로 수락했다.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시집이나 가. 젊은 스가 아쓰코에게 당시 일본 사회는 이렇게 말했다. 반발심이 든 스가 아쓰코를 본격적으로 동요시킨 것은 생텍쥐페리의 문장이었다. "스스로 대성당을 짓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완성된 대성당에서 편하게 자신의 자리를 얻으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P.146)
클럽 소개에는 파트너 소개를 TMI로 썼다. 한일 합작 영화에 출연했던 이야기부터 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져 카메오로 출연하는 게 꿈이라는 것까지 자랑인지 포부인지 그 경계가 애매모호한 소개 글을 남겼다.
죽어도 남는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종교인들이나 예술인들도 대단한 생활 설계사들인 셈이다. 그들의 해석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왜 살아가고 있는지 비로소 어렴풋이 알게 되고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잘 지어진 화장실이나 보일러를 갖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그러한 정신의 보일러가 없으면 겨울이 오지 않았는데도 전신이 오들오들 떨릴 수가 있다. (P.266)
아이처럼 여전히 자신을 설레게 하는 꿈이 있는 분,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고 원하는지 끊임없이 알아가고 실천하는 분, 따뜻한 마음과 차가운 머리를 지니신 분, 서로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분과 함께 하고 싶다고 썼다. 그리고 단순히 영화 이야기를 너머 영화를 통해 서로의 세상을 공유할 수 있는 만남이 되길 희망한다고, 그러므로 자신의 세계를 솔직 담백하게 오픈할 수 있는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한다고 썼는데, 정원 미달로 폐지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마감 알림이 떴고, 신규 멤버로부터 입사 서류 면접과 같이 꼭 뽑히길 바란다는 애교섞인 퀴즈 응답을 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지구별에 생존하는 외계인들이 모여 파티를 하게 됐다. 씀-둘일과 합동 벙개를 계획 중인 건 안 비밀.
영화가 갖는 이 마술적인 힘. 영화는 아마도 우리가 실제로 밤에 꾸는 꿈의 형태와 가장 가깝다 할 것이다. 밤만으로는 부족하여 대낮에도 꿈을 꾸고자 하는 자들은 오늘도 극장으로 향하여 마음 저 깊숙이 보고 싶었던 것들을 스크린 위에서 본다. (중략)우리에게 영화는 무엇일 수 있는가? 이 세상 것이면서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에 사람들이 열광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이 날것으로서의 세상을 못 견뎌하고 있다는 증좌라고, 나는 본다.(p.262~263)
5부. [씀-둘일] 독서 모임이란 무엇인가?_대화에서
내가 독서 모임이란 것을 체험하기 시작한 건 불과 일 년 정도밖에 안 된다. 그랬으므로 모든 것이 신선하고 새로웠는데 그중 가장 놀라웠던 점이 있다. 어떤 이는 엄청난 양의 독서 지식을 자랑하며 한 문장, 한 단어에 집착하고 탐구하면서도, 정작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인생 이야기는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독서 모임을 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를 테니 그들의 태도 역시 존중한다. 다만, 단순히 책에 대해 궁금하다면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 독서 모임을 하지 않아도, 인터넷 검색만 하면 훌륭한 서평은 쏟아져 나온다. 그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은 게 내 좁은 견해다. 그러므로 책을 매개체로 서로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무관심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4대 미스터리 중 하나다.
내가 트레바리 [씀-둘일] 멤버가 아닌 파트너를 맡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양한 사람의 인생을 읽고 싶어서였다. 밀물과 썰물처럼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부서지는 파도와 같이 변하는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읽고 싶었다. 요즘은 서로 사고의 지평을 넓혀 주는, 대화가 즐거운 짝꿍을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책을 꼭 읽어야 하나요? 물으면 사실 안 읽어도 된다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만, 책은 인류가 발명한, 사람을 경청하게 만드는 정말 많지 않은 매개 중 하나죠. 그렇게 경청하는 순간 우리가 아주 조금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자기를 비우고 남의 말을 들어보겠다는 자세요. (p.318)
김 교수는 당시 당선 소감에서 “나는 영화의 완성도에 대해 가타부타하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영화를 매개로 내 곁의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일에 대해 떠드는 것”이라고 했다. (p.322)
멤버들이 역대 최고로 읽기 어려웠다는 이전 독서 책인 알베르 카뮈의 결혼. 여름의 촌철살인(寸鐵殺人) 문장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우리는 사람의 얼굴 그 자체보다는 가장 천박한 시(詩)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다. (p.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