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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다른 타자는 구원의 공식이다

'타자의 추방' -한병철-

by 이은영

#1. 소울 메이트라는 환상을 품고 결혼하면 환장하게 된다.


‘사유는 성격 차이.... 부득이하게 이혼 결정’
‘결국, 둘의 다름을 극복하지 못했다’

요즘 연예 뉴스 일 면의 헤드라이트를 장식하는 문구다. 비단, 톱스타 부부 이야기만은 아니다. 소울 메이트라 믿었고, 운명적 만남이라 확신하며, 사랑해서 결혼까지 한 커플의 이혼 소식을 우린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타자의 부정성과 변모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경험을 만들어낸다.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를 기습하는 것, 우리를 맞히는 것, 우리를 덮치는 것,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 우리를 변모시키는 것"을 말한다. 경험의 본질은 고통이다. 그러나 같은 것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오늘날 고통은 같은 것을 지속시키는 '좋아요'에 밀려난다. (p.11)


"요즘 어떻게 지내?"

"이혼했어."

"그래?"

"응. 서로 힘들게 하며 사느니, 빨리 헤어지고, 각자 자기 길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 잘했네."


얼마 전 이혼했다는 선배와 통화하며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래. 잘했다. 뿐이었다. 그 말 말고 무슨 말을 더 해줄 수 있겠는가? 결혼도 서로의 행복을 위해 선택했듯이, 이혼도 서로의 행복을 위해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지금 그것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를 놓고 따지기에는, 힘든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가혹 행위일 뿐이다. 훗날, 자신의 결정에 후회를 하더라도 삶의 교훈을 얻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의 삶을 응원하고 믿어주는 것, 거기까지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나는 왜 그랬느냐며 더 깊이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이미 벌어지고 정리된 일에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는 없으니까.

뜬금없이 고백하건대,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실, 다른 의견을 주고받는 행위를 싸움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갈등을 피하며 피상적인 관계를 진정한 적, 싸움으로 인식한다. 하여, 언성이 높아지더라도, 잠시 서로가 꼴도 보기 싫어지고, 연락하지 않더라도, 다른 견해를 주고받는 일을 환영한다. 그것은 서로를 깊이 알아가는 과정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다른 우주가 만나 빅뱅을 일으키는 일이며, 의식 확장과 함께 서로를 구원하는 길이다. 하지만 지구 별에서 잘 싸우는 사람을 만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알랭 에랭베르Alain Ehrenberg에 따르면 우울증이 증가하는 것은 사람들이 갈등 관계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과와 최적화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문화는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허용하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성과 주체는 오직 두 가지의 상태만을 알고 있다. 기능하기와 실패하기다. 이 점에서 성과 주체는 기계와 비슷하다. 기계 또한 갈등을 알지 못한다. 기계는 오류 없이 기능하거나, 아니면 고장이 났다.

갈등을 파괴적이지 않다. 갈등에는 건설적인 측면이 있다. 갈등을 통해서야 비로소 안정된 관계와 정체성이 성립된다. 사람은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하는 가운데 성장하고 성숙한다. (p.41~42)


타자의 폭력만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타자의 추방은 아주 다른 파괴 과정을, 즉 자기 파괴를 작동시킨다. 타자의 부정성을 거부하는 시스템은 자기 파괴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이러한 폭력의 변증법은 보편적으로 작동한다.

같은 것의 폭력은 그 긍정성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다. 같은 것의 창궐은 스스로를 성장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지점을 넘어서면 생산은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고 파괴적이며, 정보는 더 이상 정보를 주지 않고 왜곡하며, 소통은 더 이상 소통적이 아니라 그저 누적적이다. (p.8)


"너는 어떤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음, 서로의 다름을 축복이라 믿는 사람. 그 다름을 잘 활용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람. 그건 다르게 표현하면 시련을 같이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지."
"은영이 너는 결혼하면 정말 잘 살 거야. 일단 결혼에 대한 환상이 없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계속해서 포용해 나가니깐."

소울메이트라는 환상을 품고 환장하게 된 기혼자들이 늘 내게 하는 말이다.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말에 동의했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풍요요, 축복이라 여기는 사람이며, 그래서 동료들의 말처럼 다양한 성향의 멤버도 모두 품고 나가는 좋은 파트너라고 말이다.


#2. 다름을 환영하는 사람을 끌어모으는 일도, 결국 나와 닮은 사람의 복제일 뿐이다.


하지만 한병철 작가의 '타자의 추방'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나라는 사람에 대해 다시 인식하게 됐다. 그것은 일종의 구원 사건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인식도 변모를 낳는다. 인식은 새로운 의식의 상태를 산출한다. 인식의 구조는 구원의 구조와 비슷하다. 구원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구원은 구원이 필요한 자를 완전히 다른 존재 상태로 옮겨놓는다. (p.12~13)


나 역시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며, 타자의 추방을 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서로의 다름을 축복으로 여겨야지, 서로의 다름을 재앙으로 여기는 사람과는 함께할 수 없던 것이다. 결국 나는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타자의 추방을 통해 자기 복제를 꿈꾸고 있었다.


이 세계는 “같은 것의 지옥”으로 전락한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지만, 현재 세계에서는 같은 것이 지옥이다. (중략) 타인 속에서도 언제나 자신과 똑같은 존재만을 확일할뿐이다. 타인에게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볼뿐인 나르시시즘적 인간은 자신 안에 갇힌 채 세계에 대한 진정한 경험도, 인식도 할 수 없고, 그 결과 자신과 세계에 대한 성찰 능력도 상실한다. 의미에 대한 성찰이 사라진 진공 속에서 인간은 같은 존재들 사이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생산에 최적화하려고 애쓸 뿐이다. (p.129~130)


지금까지 트레바리 [씀-둘일] 파트너를 하면서, 더 나아가 퀴즈 [북씨-플릭스] 파트너를 맡으면서도 자기 복제를 반복하고 있었다. 서로의 다름을 환영하며, 그것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 나와 닮은 사람만을 끌어모으고 있었을 뿐이었다. 파트너의 클럽 소개 글과 탈퇴한 멤버가 명백한 증좌이다.


전면적인 디지털 네트워크와 소통은 타자와의 만남을 쉽게 해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히려 낯선 자와 타자를 지나쳐 같은 자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발견하도록 하고, 우리의 경험 지평이 갈수록 좁아지게 만든다. 그것들은 우리를 무한한 자기 매듭 속으로 얽어 넣고, 결국에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표상들을 주입시키는 자기 선전"으로 이끈다. (p.10)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협애한 자아를 뛰어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머리를 쥐어 짜내 보지만 떠오로는 사자성어는 유유상종(類類相從). *모든 생명체는 같은 종류와 어울리고 인간은 저를 닮은 자에게 집착한다. (집회서 13,16) 나와 닮은 존재에 집착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의 본성이기에, 결이 다른 이와 어울리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고 자위한다.


사랑은 언제나 다름을 전제로 한다. 타자의 다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다름도 사랑의 전제다. 사람의 이원성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 필수적이다. "다른 한 사람이 우리와 다른, 우리와 대립되는 방식으로 살고 활동하고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말고 무엇이 사랑이겠는가? 대립하는 것들을 기쁨으로 연결하려면 사랑은 이 대립하는 것들을 제거해서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자기애도 한 사람 속에 있는, 서로 뒤섞을 수 없는 이원성(혹은 다원성)을 전제로 한다.

모든 이원성이 사라질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이원성이 모두 사라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융합되어버릴 것이다. 이 나르시시즘적인 핵융합은 치명적이다. 알랭 바디우 Alain Badiou도 사랑을 "둘의 무대"라고 부른다. 사랑은 세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 사랑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 시작되게 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의 무대에서 살고 있다. (p.106~107)


역시나. 그에 대한 해답은 오직 사랑뿐이다. 우리의 영혼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내 앞에 존재하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 살면서 사랑하는 일이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이므로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노희경 작가의 말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유죄 인가? 무죄 인가? 부디, 종신형을 선고받는 일만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수수께끼 혹은 비밀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을 잃어버렸다. 타자는 이제 유용성의 목적론에, 경제적 계산과 가치평가의 목적론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타자는 투명해진다. 타자는 경제적 객체로 강등된다. 이에 반해 수수께끼로서의 타자는 전혀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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