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1. 눈이 멀면 사물에서 멀어지고, 귀가 멀면 사람에게서 멀어진다.
주제 사라마구가 쓴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으며 사울이자 사도 바오로라 불리는 사내의 일화가 떠올랐다. 그는 예수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사람인데, 또다시 그 일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설 때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렇게 빛 속에서 눈이 멀게 되고, 곧이어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눈을 떠보지만, 빛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스스로 눈이 멀었다고 고백한다. 이렇듯 빛은 눈을 멀게도 하고 보게도 한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사울은 ‘곧은 길’이라 불리는 곳에서 예수의 제자 하나니아스를 만나게 되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눈이 열린다. 그가 다시 보게 된 세상은 전과 다른 세상이다. 그렇게 예수를 박해하던 자가 세례를 받고 ‘이방인(異邦人)의 사도’라 불리며 신약 성경의 상당 부분을 저술한 인물로 기록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눈이 먼 상태에서 자신의 체험을 기록하는 유일한 인간이 등장한다. 주제 사라마구는 그를 자신과 같은 직업인 작가로 묘사한다. 그리고는 의사의 아내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다.
이윽고 작가가 말했다.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오.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마시오. (p.414)
의사의 아내는 작가가 쓴 글을 읽고,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날 밤, 당연한 일인 것처럼 서재에서 책을 한 권 꺼내와, 모든 사람에게 읽어준다. 비록 그들이 눈은 멀었지만, 들을 귀는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의사의 아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경청하는 것은 아니었다.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다른 걱정을 하느라 듣지 못하는 처음 눈먼 남자가 있었고, 대놓고 관심 없다는 듯 잠을 청하는 사팔뜨기 소년도 있었다. 볼 수 있어도 보지 않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것처럼, 들을 수 있어도 듣지 않고,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장소가 바뀌어도 반복된다. 이처럼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먼 자들과 귀가 열려있어도 듣지 못하는 귀가 먼 자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반면, 극소수지만 눈뜬 자와 듣는 자가 함께 의지하며 살아갈 때 인간은 비소로 깨어있게 됨을 작가는 의사 부부의 대화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p.461)
그 상황을 상상하니 문득 은퇴한 노(老) 사제가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청년이 죽어서 신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됐다. 그는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지옥 불에 떨어질까 두려웠는데, 신의 물음은 의외였다. “너는 왜 네가 되지 못하고 죽어서 왔느냐?”라고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부처나 예수의 본질적인 가르침은 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그들의 가르침을 도덕과 윤리로 한정 지으려 한다면 그것은 지엽적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착하게 살지 말라는 뜻은 아니니 오해가 없기를)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핵심 화두이며 위대한 진리다. 그렇다면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채점표를 넘겨주고 안절부절못한다. 그 이유는 누가 정한 건지도 모르는 세상 기준에 부합되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 훌륭한 것이고, 성공한 인생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일부 종교의 지도자는 인간이 만든 교리를 신의 가르침처럼 설교하며, 서로를 판단하고 단죄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기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타인의 시선이나 소음에 집중하게 되고,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기보다, 남과 비교하며 비슷해지려고 노력하며 사는 것이 당연하게 된다. 학교에서 선생이라 불리는 자도, 가정에서 부모라 불리는 자도, 종교에서 지도자라 불리는 자도, 같은 공간에서 친구라 불리고, 이웃이라 불리는 자도 모두가 그러하다면 이는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는 형국이다. 그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결국 함께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다.
쉬운 예로 오늘날에도 세상 안에서의 성공을 위해 자녀의 배우자나 직업처럼 인생을 이루는 중요사안까지 대신 결정하며, 이게 다 너를 위한 일이라며 사랑과 탐욕을 분별하지 못하는 눈먼 부모가 얼마나 많은가. 또한 자기가 속한 종교가 아니면 구원은 없다며 타 종교인을 배척하게 만드는 눈먼 지도자가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인간 주제에 신을 고작 특정 종교의 울타리 안에 가두고 구원의 손길을 한정 짓는 죄를 범하고 있다) 눈이 먼 사람들은 마치 끊을 수 없는 고리처럼 같은 삶의 방식을 대물림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눈먼 사람에게 해가 언제 뜨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청각이 얼마나 예민하냐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p.281)
더 중요한 건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부활하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못하고 있지. 우리는 이미 반은 죽었어, 의사가 말했다. 반은 살아 있는 것이기도 하죠, 그의 아내가 대꾸했다. (p.426)
#2. 모든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묻고 들어야 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눈먼 깡패들이 총이나 막대기를 두드리는 소리로 다른 눈먼 자들을 위협하는 장면이 나온다. 대다수의 눈먼 자들은 그 소리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들과 같은 눈먼 자들에게 협조하며 그들의 악행에 일조한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아내를 성노예로 넘기고, 다른 여자와 성관계를 갖는 행위가 상징하는 의미) 그 때문에 원래부터 눈이 멀었던 자나, 총기로 위협하는 깡패는 손쉽게 권력을 쥐게 되고, 더욱더 견고하게 그들만의 성(castle)을 구축해 나간다. 두려움은 언제나 눈을 멀게 한다. 그것은 진리다. 더욱 소름 끼치는 현상은 두려움에 익숙해진 눈먼 자는 눈먼 깡패의 성(castle)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게 되고, 그것을 무너트린 눈뜬 의사의 아내를 원망한다는 데 있다.
그런 눈먼 자들의 세상에서는 눈뜬 자의 언행이 오히려 비정상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무리 안에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위험한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의사의 아내는 군중의 무리 안에 안전하게 섞이기 위해 처음에는 자신도 눈이 먼 사람인 척 행세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도 그들처럼 진짜로 눈이 멀기를 바라게 된다. 왜냐하면, 지혜나 통찰력은 자신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인간인지 시험하기 위해 남들은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보게 하여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사의 아내는 시간이 흐를수록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정신병동을 보며,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자 두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낼 수 있게 되고, 용기를 내게 되니 총을 든 눈먼 깡패까지 죽이게 된다. 그렇게 눈뜬 자로서 자기 앞에 놓인 끔찍한 운명을 역전시키는 데 성공한다.
다른 사람들은 시력을 잃었는데 나는 내 시력을 잃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책임감. 이 세상 모든 눈먼 사람들을 위해 길을 인도하거나 먹을 걸 갖다주는 것이 사모님의 희망이 될 수는 없어요. 그렇게 해야 돼. 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거야. (p.353)
그 후 의사의 아내는 남편에게만 말했던 자신의 정체를 함께하는 사람들에게도 밝히며 본격적으로 눈먼 자들을 돕는다. 그렇게 다사다난한 여정을 통과하다 보니 어느 순간 눈먼 자들이 눈을 뜨게 되고, 유일하게 눈뜬 자였던 의사 부인은 눈먼 자가 된다. 마치 사도 바오로의 회심(回心) 장면처럼 의사의 아내는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거대한 빛에 의해 그녀도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이때 의사의 아내가 느낀 두려움은 눈먼 자가 또 다른 눈먼 자에게 느꼈던 두려움이나, 눈이 머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두려움은 눈을 보게도 하고, 멀게도 하는 빛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야기가 이쯤 전개되니 빛 속에서 눈이 먼 의사의 아내도 사람들에게 묻고 상상하며 기록하는 작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된다. 이렇게 상상하는 데에는 너무나 명확한 근거가 있는데, 바로 작가와 의사의 아내가 나누던 대화가 복선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곳에 모여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서로의 이야기에 경청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부디 건강한 영혼과 육체로 살아남아 건필합시다!)
나한테 수용소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해 주면 좋겠소. 왜요. 나는 작가니까. 직접 거기 있어 봐야만 알 수 있어요. 작가란 다른 사람들과 똑같소. 모든 것을 알 수도 경험할 수도 없소, 따라서 물어보아야 하고 상상해야 하오. 언젠가는 그곳이 어땠는지 말씀드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럼 그때 책을 쓰도록 하세요. 그래요, 사실 나는 지금 책을 쓰고 있소. 어떻게요, 눈도 안 보일 텐데. 눈먼 사람도 글은 쓸 수 있소. (p. 411)
우리가, 내 가족과 내가 눈이 먼 이후로, 내가 써온 모든 것이 갑자기 우습게 느껴지는구려. 무엇에 대해 쓰셨는데요. 우리가 겪은 것에 대해서, 우리 삶에 대해서. 모든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해 말을 해야 해요, 그리고 모르는 것은 물어봐야 해요. 그래서 내가 묻고 있는 거요. 그럼 내가 대답하죠, 하지만 언제일지는 모르겠어요, 언젠가는 반드시 대답할게요. 의사의 아내는 종이로 작가의 손을 건드렸다. (p.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