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 '박화영' -이환-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당황하며 일시 정지를 눌렀다. 그리고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귀에 에어팟을 꽂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입에 담기 힘든 폭언과 육욕에 젖어 행동하는 그들의 모습이 거침없이 화면을 채워 나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깨끗한 이불 위에서 간식을 먹으며 여유롭게 영화와 책을 본다. 그때 아직 나를 버리지 않은(?) 부모님이 거실에서 다정하게 TV를 보며 까르륵 웃으신다. 핸드폰 속 카톡방을 열자, 언제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함께 울고 웃는 친구들이 수다를 떨고 있다. 가끔 주변 사람은 내게 고민 상담을 해온다. 누군가는 이런 상황에서 은영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하며 방법을 찾는다고 했다. 최근엔 상담해주다 친구에게 존경한다는 말까지 들었다. 이토록 나를 좋게 봐주며 믿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된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핸드폰 화면 위를 쓱쓱 문지르며 자산관리 앱인 뱅크샐러드를 켰다. 이달 카드값을 내고도 여유롭게 남아있는 통장 잔고를 확인하며 앱을 닫는다. 지금 나의 현실은 안온하다. 반면, 영화와 책 속 인물의 삶은 경험하고 싶지 않은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부랑인의 전형적인 성격, 즉 비천하고 질투하는 자칼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중략) 그의 인성을 파괴한 것은 영양실조일 뿐이지 타고난 악덕이 아니었다. (P.200)
오래전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하니까 주변에서 봉사활동을 해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죠. 그렇게 나보다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사람을 돕다 보니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더라고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의 마음이 뾰족해졌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위치란 상대보다 우위를 선점하여 우월감을 느끼는 자리였던가? 그래서 인간은 봉사 활동을 통해 자기 가치를 확인하게 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시절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으로 하는 행동을 봉사나 자선이라 부를 수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물었다. 봉사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씀’이며, 자선은 ‘남을 불쌍히 여겨 도와줌’이다.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한다는 것은 호구 인증이나 위선으로 느껴지고, 남을 불쌍히 여겨 도와줌은 교만으로 느껴졌다면 억지스러운 걸까? 나 자신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봉사나 자선을 하면서 배운 점이 있다면, 상대의 고통이 나의 고통처럼 느껴질 때 기꺼이 나서서 돕게 된다는 것이다. 그 외의 마음에서 하는 봉사나 자선은 도움을 받는 상대와 도움을 주는 자신 모두에게 반드시 상처를 준다.
자선을 받는 사람은 거의 언제나 은인을 미워한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고정된 특징이다. 그리고 자신을 뒷받침하는 사람들이 50명 내지 백 명이 있으면, 그 특징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P.244)
엄마와 인연을 끊는 대가로 얻은 집에 혼자 남게 된 박화영은 문을 나서는 엄마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엄마도 엄마 같은 엄마 만나." 장면은 바뀌고 가출 청소년, 비행 청소년의 아지트가 된 집은 어둡고 침침하다. 그들 사이에서 박화영은 '엄마'라 불리며 밥과 빨래를 해준다. 심지어 친엄마를 협박해서 얻은 돈을 용돈 하라며 아낌없이 내어 준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고 폭력의 희생양이 되며, 살인 누명까지 쓴다. 단지, '그들의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친구인 척하지만 자신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박화영은 언제나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니들은 나 없으면 어쩔 뻔 봤냐?"
그런 박화영은 친엄마나 경찰, 선생님 앞에서는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오히려 공격적이다. 자신에게 기생하지 않는 존재 앞에서는 세상 거칠 것 없이 행동하지만, 자신에게 기생하는 존재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해진다. 그들의 무리 안에서 소속감과 인정을 얻기 위해 희생양처럼 모든 불합리함을 기꺼이 껴안고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화영은 기생충 같은 그들에게 철저히 버림받는다. 그러자 또다시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관계를 형성한다. 박화영은 그런 관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끊임없이 확인한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니들은 나 없으면 어쩔 뻔 봤냐?"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으로 일약 스타가 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의 저자 김영민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추천한 영화 '박화영'. 그리고 조지 오웰 작가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험하며 쓴 르포르타주 형식의 첫 작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함께 보며 생각했다. 흔히 삶의 최하층이라 일컫는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기나 한 걸까? 오히려 그들의 슬픔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일상에 안도하며, 그저 탁상공론에 끝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지성인인 척하는 것이 다가 아닐까? 더 나아가 그들의 삶을 두고 최하층, 밑바닥 인생이라고 낙인찍는 일은 누가 부여해준 특권인가? 내가 이런 종류의 작품을 보며 불편한 마음이 드는 진짜 이유는, 독자와 관객은 디스토피아(dystopia)를 구경하는 방관자일 뿐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에릭 블레어가 가족과 친지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조지 오웰이란 가명으로 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은 <파리와 런던의 빈털터리>,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등 다양한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파리와 런던 거리의 성자들>이라는 제목도 있는데 이 역시 위에 열거한 제목과 같은 책이다. 나는 이따금 생각한다.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는 삶의 밑바닥과 신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는 삶의 밑바닥이 반대일 수도 있겠다고. 스스로 바르고 거룩하다고 자부하던 성당 안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에게 너희보다 창녀가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꾸짖던 예수의 말이 떠오르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