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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by 이은영

"사랑하는 내 아이야. 이제 선택하거라."


"음... 아버지! 저기가 좋겠어요. 서울 노원구 단칸방에서 두 살배기 곱슬머리 남자아이를 낳아 기르는 가정에서 딸로 태어날래요."


"어디 보자... 저 집. 네 부모가 될 사람들은 일단 서로 종교부터 다르고, 취향이나 가정환경도 다르구나. 이런저런 이유로 서로 실망하여 사니 못 사니 하며 위기도 있겠고, 아이를 양육하는 방법도 서툴러서 한동안은 한배 속에서 태어났는데 왜 이렇게 다르냐며 너와 저 남자아이를 비교할 것이다. 게다가 네가 저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언행을 할 때면 서로의 배우자를 닮았다며 싸울 거란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손에 침을 묻혀 장부를 또 한 장 넘겼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또... 어디 보자. 일관성 없이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너를 혼내고 나서 뒤 돌아 우는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들이구나. 아직 사랑과 욕망을 구분하는 법을 몰라, 네게 자신들의 욕망을 바라면서도 다 너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라 믿을 것이다.

음... 그리고 네 아비가 될 사람의 큰 누나와 막냇동생은 장애를 가졌는데 네 아비는 그것에 콤플렉스가 있구나. 연애할 때 네 어미 될 사람에게 울면서 그 사실을 고백했는데, 네 어미 될 사람은 도망칠 마지막 기회를 버렸구나. 자신이 그들을 잘 섬겨서 남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줘야겠다고 다짐을 했어?! 어허 고생을 자처하는 인간형이구나.

아... 저들의 학력은 사회 기준치 미달이고, 경제적 수준은 네가 종이 인형이 갖고 싶다고 말해도 사줄 형편조차 안 된단다.

얘야... 생명책에 적힌 저들은 세상 기준치로 보면 하자 인생이다. 아직 네 가정이 결정된 건 아니니, 좋은 조건의 집도 한 번 더 훑어보고 선택해도 된단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는 잠시 미간을 찡그렸지만 다시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완벽해요! 저 가정에서 자라야 제가 장애와 더불어 차별을, 사랑과 더불어 배제를, 완벽함과 더불어 고통을 함께 붙잡고 고민하면서 저의 미션을 완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얘야. 지구별에서 사는 동안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 많을 것이다.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 배워가는 동안 네 눈물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님을 배우게 될 거다.

진정한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장미가 네 삶을 가득히 채우는 날, 네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단다.

그러니 기억해라. 네 영혼은 나의 형상인 사랑으로 빚어지고 사랑에서 태어났으니, 사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아버지. 혹시라도 제가 원망이나 미움의 마음 때문에 지구별 순례의 목적을 잊고, 고향별로 돌아오지 못하면 어떡하죠?"


"얘야. 두려워하지 마라. 어두운 곳에서 빛은 더욱 밝게 빛난다는 징표를 네게 보여 주겠다. 시련 속에서도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빛나는 달과 별을 올려다보아라. 시련은 너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줄 뿐, 네가 극복해야 할 것은 오직 네 안의 자아(ego)라는 것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네게 약속 하마. 미션을 완수하고 고향별로 돌아올 수 있도록, 네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널 혼자 두지 않겠다. 마음속 사랑의 소리를 따라라."


응애! 응애! 1981년 03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계동 단칸방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할머니는 아이를 직접 받아 탯줄을 잘랐다.

"미녀야. 예쁜 공주님이구나~"

"뭐? 남자애가 아니라 여자애라고?"

"너는 첫애가 남자애인데 뭔 아들 욕심이 그리 많니? 둘째가 여자 애니까 더 좋지."

"엄마.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사실 예전에 지나가던 여승이 우리 집 대문을 열고 들어와서 물 한잔 달라고 한 적이 있었어. 그때 현민이가 마루에 누워서 자고 있었는데, 내 배를 쳐다보더니 저기 누워있는 사내 녀석보다 더 크게 될 장군감이 태어날 테니 잘 키우라고 했단 말이야. 난 그때 내가 임신한 줄도 몰랐어. 그래서 여승이 아닌 미친 여자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정말 임신을 했더라고. 그러니 내심 얼마나 기대를 했겠어. 그런데 장군감이 남자애가 아니라 여자애라니... 난 틀림없이 남자애일 줄 알았다고!"


엄마의 실망과 달리 퇴근 후 돌아온 아빠는 딸아이를 얻은 기쁨에 감사 기도를 드렸다. 일주일 동안 옥편을 펼치고 세상에 하나뿐인 딸아이의 이름 짓기 삼매경에 빠졌다. 지구별에서 아주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중계동 단칸방의 불빛은 밤새 빛을 내고 있었다.

이 작은미녀, 이 빛나. 두 개의 이름이 리스트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 후 여자아이의 부모는 동사무소에 가서 종이 위에 새로운 가족 이름을 새겨 넣었다.


李恩永. 고심 끝에 신의 은혜를 길게 받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지어 준 이름이었다.

“이은영” 사람들은 여자아이를 그렇게 불렀다. 은영은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이름에 동그라미가 4개나 들어가서 그런지 잘 굴러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은영의 머리 위로 밤하늘이 펼쳐지고 달과 별이 빛을 내고 있었다. 지구별에서 여러 밤을 보낸 후 뒤집기를 성공했고, 잡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아장아장 뒤뚱뒤뚱 걷기 시작했다. 걷기까지 천 번을 넘어지고 뛰기까지 삼천 번을 넘어져야 했다. 한동안 걷지 못해 휠체어에 의지하던 시절도 있었다. 고향별에서는 날아다녀 이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는데, 매일이 도전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은영이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흘릴 때마다 지구별에 장미꽃이 하나 둘 피어났다.


p.s. 함께들을 음악 -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


https://www.youtube.com/watch?v=rolB1frxNMc&feature=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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