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곳은 황정은 작가 소설 <百의 그림자>의 무대인 재개발 뉴타운 지역이다. 그곳에 우리 가족과 이웃이 산다. 소설에는 재개발 지역을 두고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나야말로. (P.113)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P.115)
나야말로. 내가 사는 동네가 슬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뉴타운 재개발 지역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또는 슬럼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슬럼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도시사회에서의 지역 병리 현상의 하나로 일반적으로 빈민이 많은 지구나 주택환경이 나쁜 지구를 말한다.'
간단하게 슬럼(slum)은 '도시의 빈민굴'을 뜻한다. 슬럼의 어원은 slumber(잠. 선잠)인데, 눈에 띄지 않는 뒷골목 등 누군가 '졸고 있는 듯한 장소'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사회적으로는 이렇게 설명되지 않을까. 첫 번째, 이혼·가출·별거 등 이른바 가족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많고, 두 번째,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자가 많으며 이동성이 높고, 세 번째, 저임금자 및 수입이 불안정한 사람이 많은 곳.
어디 그뿐이랴. 네이버 지식백과 등에 따르면, 인간관계의 측면에서는 비뚤어진 인격, 찰나적·향락적 생활 태도, 익명성(匿名性) 등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슬럼으로는 미국의 흑인 슬럼가인 할렘(Harlem) 등이 유명하단다.
우리 사회가 슬럼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매스미디어가 보여주는 것과 비슷하다. 가난과 폭력, 마약과 살인 같은 범죄로 얼룩진 '갱'들이 가득한 위험 지역. 하여, 슬럼이라는 용어는 현실과 동떨어진 편견을 만들어 인간의 무의식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대한민국 뉴타운 재개발 지역은, 보통의 우리 이웃이 사는 평범한 '동네'일뿐이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에는 이런 시구가 적혀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의 아름다운 시구처럼 여전히 우리 동네 연탄재는 함부로 차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다.
해마다 겨울이면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기업 로고가 박힌 단체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연탄을 나르며 사진을 찍는다. 연탄은 내 이웃들에겐 그저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곳에서 처음 연탄과 마주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서울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다니!'라는 놀라움을 드러낸다. 동시에 '불쌍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연탄을 나르고 떠나는 뒷모습에는 '이토록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도움 주는 입장이니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담겨있는 듯하다.
그러나 오랜 세월 뉴타운 재개발 지역에서 살며 들여다본 인간의 삶은, 잠깐 선행을 베풀고 떠나는 낯선 이의 시선처럼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사실 동일한 뉴타운 재개발 지역에 살더라도 저마다의 소득 수준과 생활환경은 벽 하나를 두고도 천지 차이다. 같은 서울이지만 지역마다 소득 수준과 생활환경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현재 가진 것으로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편 가르지 않는다.
오히려 가진 것의 크기와 상관없이 서로 어울리며, 자신의 것을 쪼개어 나누는 모습을 우리 동네에선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다.
코로나 공포로 모두가 떨던 지난해, 우리 집 벨을 누르고 누군가 사라졌다. 마스크를 쓰고 현관문 앞으로 나가보니 문고리에 손글씨가 쓰인 파란 종이 가방이 걸려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얼굴을 마주할 수 없지만, 마음은 마주 할 수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배웠다. 이에 질세라 온 가족이 거실에서 얼굴을 맞대고 부담스럽지 않을 선물과 함께 답장 문구를 열심히 골랐다.
"어머! 주신 떡은 너무 잘 받았어요. :) 이웃사촌님 격하게 환영합니다~~! ♥.♥ 이렇게 적을까?"
"아니~ 뭐가 그렇게 호들갑스럽고 요란해. 오버하지 말고 부담스럽지 않게 써 봐."
결국 나는 두 장의 종이를 구겨 버린 후에야 웃음과 하트 표시를 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번역 프로그램을 돌린 것 같은 환영 인사를 남겼다. (웃음)
가끔 우리 집 현관문 손잡이에는 이웃사촌들이 나누고 간 정이 걸려있다. 직접 쑨 도토리묵부터 산에 가서 캐온 나물까지. 별거지만 별거 아닌 것 같은 이웃의 온기가 굳게 닫힌 현관문을 열고 스며든다.
뉴타운 재개발 지역인 우리 동네는 코로나 비대면 속에서도 마음을 마주 보며 살아남았다. 먹을 것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일손이든, 그 무엇이든 나누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진정한 부의 척도는, 얼마나 가졌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나누었느냐에 달린 것인지도 모른다.
타인과의 비교하는 문화가 남아있는 한, '가난'이라는 개념은 사라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혐오하지 않는 관계는 가능하다. 나는 여느 종교의 가르침처럼 가난한 삶을 추구하거나 예찬하는 부류는 결코 아니지만, 가난에 대한 무지는 경계한다.
원래 뉴타운이란 합리적인 도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신도시 건설 정책을 의미한다. 동시에 투자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상품이다.
나는 오랜 세월 뉴타운 조합원을 거쳐 대의원을 지나 현재 홍보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렇기에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크고 작은 사건과 더딘 진행에 마음고생만 하다가 손절매한 조합원도 많이 보았다. 그만큼 뉴타운의 실현 가능성 측면에서 어려운 요소가 많다는 뜻이다.
사실 뉴타운 사업에서 가장 힘든 점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다. 의견 일치가 안 되면 사업은 결국 중단되거나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허송세월하게 된다. 게다가 정부의 오락가락하는 부동산 정책까지 합세해 발목을 잡으면 마음을 졸이는 시간은 더욱더 길어진다.
지난한 세월이 지나고, 최근 "취임하면 일주일 안에 재개발, 재건축 규제를 풀겠습니다"라는 공약을 내세운 후보의 서울시장의 당선 소식이 들려왔다.
"엄마. 재개발되면 자기 소유의 집이 없는 사람은 다 어디로 가?"
"재개발을 하면 의무적으로 임대아파트를 지어야 해. 용적률에 따라 그 수는 달라지긴 하지만, 어쨌든 2017년 6월 이전에 입주한 사람은 임대주택을 줘. 그러나 그 이후에 입주한 사람은 이주 비용만 주지."
"그렇다면 서울에서 이주 비용으로 이사 갈만한 곳을 찾을 수 있을까?"
"음... 그게 어려운 거지."
수많은 조합원이 상상하는 도시가 현실이 되는 날, 우리 가족과 이웃은 과연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나는 뉴타운 재개발 지역에 산다. 그러나 이곳이 슬럼은 아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 2021년 04월 14일 <당신들의 상상과는 다른, 재개발 지역에 삽니다> 로 '기사공모' 중 연재 기사 12화에 실렸습니다. 다음, 네이버 뉴스에도 올라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