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영 기자님 축하드립니다. 8월 이달의 뉴스 게릴라 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지난여름, 단 4편의 연재 기사 덕분에 나는 한 언론사로부터 특별 기자 상을 받았다. 그건 매우 뜻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인기 칼럼을 연재하게 된 계기는 인생 해저드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지난 6월, 나는 수개월째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개인 브런치는 고사하고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던 사는 이야기마저 긴 공백으로 인해 자동 종료된 상황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시기에는 글 쓰는 일이 전처럼 즐겁지 않았고, 오히려 짐처럼 여겨졌다.
그랬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글럼프에 빠진 것이다. 어쩌면 이대로 내 꿈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매몰될 때쯤, 내가 선택한 것은 오랜 세월 손 놓은 골프에 다시 집중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글럼프가 왔을 때 나에게 또 다른 재미와 열정 그리고 깨달음을 주었던 골프는 다시 글로 기록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면 골프라는 스포츠는 인생이라고 부르는 게임과 참 많이 닮았다. 흔히 굿 샷이라고 말하는 안전한 페어웨이 위로 가면서도 재미없는 경기를 기록할 수도 있고, 모두가 우려하는 트러블샷에서도 최고의 경기를 펼칠 수 있으니 말이다.
인간의 마음과 계획대로만 되지 않는 것이 골프와 인생이 아니던가. 라운딩을 하다 보면 공이 벙커나 러프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물론 나 같은 아마추어 골퍼는 원활한 경기를 위해 동반자의 동의하에 공을 치기 좋은 위치로 옮기곤 한다. 그러나 실력 좋은 골퍼는 있는 그대로 공을 쳐야 한다는 골프의 대원칙을 지킨다.
정교한 샷을 날리는 프로조차도 골프 경기에서 장애물인 벙커나 러프, 해저드를 피하지 못한다. 사실 최경주 프로나 박세리 감독처럼 골프계의 레전드라고 불리는 프로일지라도 미스샷을 친다. 단지, 그들의 멘털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골프는 원래 그런 운동이다”라고 빠르게 인정하는 데 있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거친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훌륭한 선장은 잔잔한 바다가 아닌 성난 파도가 만든다. 이러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믿고 응원해 주는 태도가 골프 게임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도전과 실패가 당연한 일이듯, 골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미스샷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훌륭한 골퍼는 이미 벌어진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기보다 실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바로 다음 샷을 준비한다.
IMF로 전 국민이 희망을 잃어가던 1998년, US오픈 연장전 박세리 감독의 '맨발 투혼'을 기억한다. 박세리가 신발과 양말을 벗고 그대로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맨발 샷을 날리 던 영상은 MZ세대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레전드 영상이다.
BGM으로 깔리던 가수 양희은의 '상록수' 가사 말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와 찰떡인 그날의 경기는 이러했다.
당시 박세리는 태국계 미국인 제니 추아시리폰과 18홀 연장 승부를 벌였다. 그러나 18번 홀에서 박세리의 티샷이 페어웨이 왼쪽 해저드로 빠졌다.
그 순간 박세리는 드롭하고 페널티(해저드에 빠지면 +1벌타를 받고 주변 그린 위에 올려놓고 친다)를 받고 칠 것인가, 물에 들어가서 그대로 칠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한다. 무모한 도전인 것을 알면서도 내면의 소리를 따라, 52도 웨지를 들고 두 번째 샷을 친다. 그대로 공을 밖으로 꺼내는 데 성공한 그녀는 마침내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훗날 박세리는 '레전드 토크 박세리와 함께'라는 TV 프로그램에 나와 그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자평했다.
"그러한 도전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때였기에, 만일 실수가 나왔다고 해도 후회는 안 했을 것 같다. 흔히 말하는 스위트 스폿에 정확히 맞는 느낌, 짜릿하고 가장 좋았던 느낌은 저 때가 선수 생활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날 박세리 경기 모습은 스스로도 인생 최고의 샷으로 꼽았지만, USGA 팬 투표에서도 역대 US 여자오픈 명장면 2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언제나 훌륭한 골퍼는 다양한 트러블 샷을 통해 탄생한다. 실내 연습장에서 벽만 보고 훈련하는 골퍼는 대자연 속 필드 위에서 당황하기 마련이다.
벙커나 러프처럼 스윙하기 힘든 트러블 샷에서 중요한 것은 머릿속 이론이 아니다. 일단 그것을 시도하려는 용기이며, 실천하여 얻은 소중한 실패와 성공 속에서 인생을 배우려는 태도다.
원치 않는 방향으로 공이 날아갈지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자리에서 다음 샷으로 이어가는 일은 인생과도 닮았다. 무엇보다 골퍼는 경기에 임하기 전 자신의 나약함과 두려움 등 실체 없는 내면의 공포와 먼저 싸워 이겨야 한다. 언제나 가장 좋은 전략은 자신을 믿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수많은 땀과 눈물을 흘리라고 요구한다. 살아있는 자는 누구든지 그 요구에 응할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 세상의 요구 앞에서 누군가는 주저앉아 불평불만 하느라 땀과 눈물을 흘리지만, 누군가는 당당하게 자신의 꿈을 외치면서 땀과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운명은 우리가 흘린 씨앗보다 언제나 더 많은 것들을 가져다준다.
어린 시절부터 장래희망이었던 패션 디자이너가 돼서, 일본 유학까지 다녀와 패션 사업까지 하던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듣게 된 계기는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직접 모델 일을 하며 쇼핑몰 대표직을 맡아 승승장구하던 사업이, 관리받던 피부과에서 내 얼굴에 의료 사고를 내며 난항을 겪었다. 그로 인해 1년 간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을 앓았다. 함께 사업을 하던 연인과도 이별하며 나는 그해 죽음을 생각했다.
매일 아침 눈뜨는 일이 죽기보다 싫었던 그때였지만, 나는 죽음 대신 내면의 소리를 따라 책을 읽으며 내 삶을 글로 쓰는 선택을 했다. 누군가는 그런 나에게 미쳤다며 수군거렸지만, 나는 내 자신을 믿고 응원해주었다. 그렇게 인생 트러블샷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나만의 깃대를 향해 날린 수많은 샷들이 오늘날 여기까지 나를 데려왔다.
누구의 인생이든 우여곡절이 있기 마련이고, 이를 어떻게 극복해나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최악의 샷이라도 행운으로 연결될 수 있으니 자신의 삶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기적이란 그런 삶을 음미하는 하루하루가 모여 만들어내는 일상이 아닐까.
살다 보면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삶이 주는 또 다른 기회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덕분에 이제는 인생에 슬럼프가 없기를 바라기 보다, 슬럼프조차 실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로 만드는 연금술을 배워가는 중이다. 이런 삶의 태도는 소중한 내 인생에 참 많은 선물을 가져다준다.
그중에서 가장 큰 선물은 뭐니 뭐니 해도 머니 일까? (웃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정말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믿으면서, 스스로 제법 근사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건강한 자존감에 있다.
더불어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도전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나 성취해나가면서 자기 효능감도 높아지는 중이다. 이 모든 것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보물이다.
이런 보물이 내면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면 타인의 평가보다 자기 자신의 시선을 더욱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 결과 세상이 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삶이 아닌 자기 스스로 반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가는 삶에 몰입하게 된다.
그렇게 오랜 세월 꿈꿔왔던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이며 인생 샷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