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해도 좋다는 철학적 허락을 얻다.

실패해도 괜찮은 영역이 넓어지는 것이 풍요다.

by 독학력 by 고요엘

언제부터였을까. 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결과'부터 계산하기 시작했다. 가성비와 효율이 삶의 척도가 된 세상에서, 성과가 보장되지 않는 일에 뛰어드는 것은 어리석은 낭비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철학자 박구용은 우리에게 낯설고도 준엄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삶에는 실패해도 좋을 시도가 있는가?"라고 말이다. 이 질문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느라 숨 가쁜 우리에게, 잠시 멈춰 서서 삶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박구용 교수의 통찰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는 크게 '노동'과 '놀이'로 나뉜다. 노동은 목적이 행위의 바깥에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승진하기 위해, 혹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하는 일들은 모두 노동이다. 노동은 반드시 성공해야만 의미가 있으며, 실패하는 순간 그 시간은 '버려진 시간'이 된다. 반면, 놀이는 그 과정 자체가 목적이다. 실패해도 삶이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그 서툰 과정 속에서 예기치 못한 감각이 깨어난다. 모든 시도가 성공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삶을 옥죄는 가혹한 형벌이겠지만, 실패해도 상관없는 시도가 허용될 때 인간은 비로소 숨을 쉰다.


​사실 나의 일상도 오랫동안 '노동'의 논리에 갇혀 있었다. 새로 시작한 운동이나 외국어 공부, 혹은 작게 시작했던 취미 활동 조차 잘해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즐거움보다는 피로감으로 다가오곤 했다. 하지만 "실패해도 좋다"는 철학적 허락을 얻고 나자 풍경이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결과가 나빠도 내 인생이 망가지지 않는 영역, 타인의 평가로부터 온전히 격리된 나만의 '놀이터'를 가꾸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은 것이다. 엉망으로 그려진 그림이나 서툰 악기 연주 속에는 성공한 결과물보다 더 생생한 '나의 존재'가 살고 있다.
​결국 풍요로운 삶이란 성공의 전유물을 높이 쌓는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괜찮은 영역'을 얼마나 넓게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세상이 정해놓은 효율의 잣대를 거부하고, 기꺼이 무용한 일에 열정을 쏟는 순간 우리는 도구가 아닌 인간이 된다. 실패할 권리를 회복하는 것, 그것은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 자신으로 존재하겠다는 가장 용기 있는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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