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時節因緣)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무리 지어 노는 것보다 1:1 관계를 맺으며 한 사람을 온전히 알아가는 것을 더 선호했다. 대학시절 내내 붙어 다닌 친구가 있다. 나는 그 친구를 1학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만났다. 경상남도 진주에서 올라온 그녀는 1년 재수를 해서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나에게 먼저 편하게 친구로 지내자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그 친구는 귀여운 경상도 사투리에 웃음이 많고 유머러스하며, 인심이 넉넉해서 동기들에게 인기가 꽤 많은 편이었다. 그 친구로부터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우리는 모두 기숙사에서 지냈는데 아침 밥을 먹을 때부터 저녁 식사를 마칠 때까지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낸 것 같다. 둘 다 가톨릭 신자여서 주말에도 함께 성당에 가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엉뚱한 짓을 하는 코드도 잘 맞았다. 학교에 빨간 아토스를 모는 남자 선배가 있었다. 아토스는 1997년 9월에 현대차에서 출시한 경차이다. 당시 차를 갖고 있는 학생이 많지 않았기에 빨간색 아토스는 더욱 눈길을 끌었었다. 어느 날 기숙사 앞에 주차되어 아토스를 보고 우리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경차가 얼마나 가벼운지 들어보고 싶었다.
“우리 저 차, 한번 들어볼까?” 누가 먼저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우리는 동시에 아토스 뒤로 가서 차체에 등을 대고 손으로 들어올리려고 시도했다. “오! 움직인다. 가볍네~” 하고 있는 순간 앞 좌석 양쪽 문이 동시에 열리며 그 선배와 여자친구가 나왔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두 사람에게 우리는 큰소리로 “죄송합니다~!”를 외치며 냅다 뛰어 달아났다.
또 한번은 너무 학교 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것 같다며 둘이 오후 수업을 째고 일탈을 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쩜 그리 순수했는지, 우리가 하는 일탈이라는 것이 온양온천으로 온천욕을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둘이 함께 겨울연가 배경지인 남이섬으로 기차 타고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나는 3학년이 되어 학과대표를 맡게 되면서 이리저리 정신 없이 불려 다녔다. 신입생 환영회, 총학생회 회의, 하기 싫은 등록금인상 반대 시위도 해야 했고 그러한 일로 교수님들과 면담도 해야 했다. 3학년이면 본격적으로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준비해야 하는 시기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불안했고 점점 지쳐갔다. 반면 그 친구는 나에게 대표를 밀어 놓고 혼자 열심히 공부를 했다. 나는 내 힘든 상황을 좀 이해하고 의지가 되어 줬으면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관계는 조금씩 어색해졌고 대화도 줄어 들었다. 결국 나는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1년간 영어 공부를 하면서 교환학생 준비를 했고 4학년이 되어 교환학생을 다녀온 덕분에 동기들보다 1년 반정도 늦게 졸업을 했다.
그 친구는 졸업과 동시에 6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좋은 남자 만나 결혼도 동기 중 일찍한 편에 속했다. 부산에서 결혼식을 올려서 동기들과 함께 모두 부산으로 몰려갔었다. 결혼식 뒤로는 아쉽게도 소식이 끊겼다. 아이 낳고 허리가 아파 휴직을 했다는데 지금은 괜찮은지 궁금하기도 하다. 지금도 공무원 생활 충실히 하면서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기를 바란다.
나는 불교용어인 시절인연(時節因緣)을 자주 생각한다.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다는 뜻이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될 인연은 만나게 되어 있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만나지 못할 인연은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맺고 있는 인연들에 더 충실하고 그 인연들이 떠난다 해도 너무 속상해 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의 인연이 거기까지인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