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얼렁뚱땅 하다보면, 진짜가 된다

by 서빈

'얼렁뚱땅’이란 단어를 좋아한다. 돌아보면 내 인생의 중요한 지점들이 대부분 ‘얼렁뚱땅’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수능을 망치고 방구석 벽만 보고 있던 나대신 친구가 점수에 맞춰 지원해준 학과가 결국은 돌고 돌아 ‘얼렁뚱땅’ 주 전공이 되었다. 러시아학과 공부도 재밌었지만, TV 드라마를 더 좋아해 결국 전공과 무관하게 ‘얼렁뚱땅’ 드라마 PD를 준비했다. 근데 웬걸, 졸업 후 겨우 도착한 방송국 최종 임원 면접에서 똑 떨어지며 갈 곳이 없어졌다. 내년도 공채 준비를 위해 잠시 스펙이나 쌓을까 싶어 다닌 작가교육원을 무려 1년 6개월이나 ‘얼렁뚱땅’ 다녔다.



드라마는 좋아했지만, 주말 드라마는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작가님이 좋은 분이란 친구의 말 한 마디에 ‘얼렁뚱땅’ 보조 작가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작품이 종영할 때까지 또 1년이 지났다. 그 시간동안 쓰는 사람이 되자는 결심을 굳혔지만, 나이 서른에 인생 좌표 잘못 찍으면 진짜 골로 갈 거 같단 두려움이 매우 컸다. 드라마 작가는 결국 미니시리즈를 쓸 수 있느냐의 여부로 생사가 갈리기에, 드라마 PD를 준비하며 썼던 A4 1장짜리 기획안을 토대로 16부작 미니시리즈를 구상했다. 물론, 이를 써내지 못하면 미련 없이 물러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나는 작품을 완성했고, 그 작품이 ‘얼렁뚱땅’ 방송사 미니시리즈 공모 최종심에 갔다. 500여 작품 중 10편 안에 선정된 것이었다. 나는 바랬다. 부디 ‘얼렁뚱땅’ 신이 오시어, 떡하니 당선되기를. 하지만 그 기도는 무참히 외면당했고, 이후 난 밥벌이를 위해 방송사 드라마부의 기획 작가로 일하며 8편의 드라마 기획에 참여했다. 그렇게 또 ‘얼렁뚱땅’ 2년이 지났다. 이 긴 시간동안 내가 알게 된 건 어쩌면 단 한 가지였다. 얼렁뚱땅 하다보면, 진짜가 된다는 것.


미국 뉴욕의 요가원 ‘The Shala’


이 지리멸렬한 시간을 견디게 해준 건 다름 아닌 ‘요가’였다. 20대 초반, 다이어트를 위해 요가원을 찾았었다. 근력은 없지만 유연성은 있던 편이라 빈야사 동작을 따라함이 그리 어렵지 않았고, 무엇보다 선생님을 만나는 게 즐거워 요가원에 지속적으로 다닐 수 있었다. 전공 수업이 1교시인 날도, 비나 눈이 몰아치는 날에도 나는 어김없이 새벽 수련에 가장 먼저 출석했다. 엄청난 태풍으로 상가 간판 몇 개가 떨어진 날 새벽에도, 홍대 집에서 요가원이 있던 망원 역까지 묵묵히 걸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당연히 왔을 거라 예상하며, 택시를 타고 왔다던 선생님의 놀란 표정은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당시 내가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수련을 이어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주 목적이었던 다이어트는 이미 물 건너 간지 오래였는데, 이유 모를 그 짓(?)을 나는 6년이나 이어갔다. 그러던 중, 선생님이 내게 아쉬탕가 빈야사 요가 수련을 한 번 해보라 권하셔서 요가원을 옮긴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처음 1년은 하프 수련임에도 불구하고, 되는 동작이 반도 안 되어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근력이 부족했다. 그래도 욕심내지 않고 꾸준히 수련했다. 나는 요가 강사가 아니니까 괜찮다 위로하면서. 동작과 호흡에 집중하며 머릿속이 진공상태가 되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그렇게 또 6년이 흘렀다.


미국 뉴욕의 요가원 ‘The Shala’


특히 2018년은 퇴사 후 온전히 내 작품만을 쓰며, 요가에 많이 의지했다. 해가 떠 있을 땐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고, 해가 질 무렵엔 요가원에 들렀다 집에 돌아와 잠을 잤다. 종일 앉아서 쓴 대본의 질은 가늠되지 않았지만, 수련을 이어간 몸의 변화는 가늠되었기에 대본 또한 내 노력만큼 잘 되고 있을 거라며 나름의 위로를 하곤 했다. 물론, 그 시간 동안 갈증도 심해졌다. 이제는 요가 동작만이 아니라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워, 내가 요가를 통해 받은 많은 혜택을 사람들과 제대로 나누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 2019년이 시작되는 날 요가 지도자 과정(TTC, Teacher Training Course)을 등록했다. 그렇다. 제목은 ‘얼렁뚱땅, 요가 강사가 되었다’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요가 지도자 과정 D-1일, 나는 아직 요가 강사가 아니다. 이 글이 마무리되는 시점엔 늘 그랬듯이 ‘얼렁뚱땅’ 요가 강사가 돼있길 바라며 오늘도 쓰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쌓인 좋은 에너지가 내가 쓰는 대본에도 고스란히 묻어있기를, 그 대본이 내가 참여하는 10번째 드라마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두 손 모아 나마스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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