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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기 Mar 08. 2016

움베르토 에코에 대한 놀랍지 않은 7가지 사실

우리는 난쟁이이지만 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난쟁이다. 우리는 작지만 때론
거인보다 먼 곳을 내다보기도 한다 - 장미의 이름 중




움베르토 에코(1932.1.5 - 2016.2.19)

기호학자이자 미학자이자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소설가. 9개 국어를 구사하고 본인이 재직하던 볼로냐 대학 도서관의 모든 책의 위치를 알고 있었던 괴력의 기억력을 가졌던 사람.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을 향유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독자들과 나눌 줄 알았던 시대 최고의 지성인.


Umberto Eco

 지난 2월 20일(이탈리아 현지 날짜로는 19일), 움베르토 에코가 타계했다. 이 시대 가장 방대하고 견고했던 도서관이 무너져버렸다 생각했다. 그의 영혼과 지식은 어디로 갔을까? 하지만 그의 소설, 에세이 그리고 미학 서적들은 여전히 책과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에코는 죽었어도 책 속 그의 이야기는 인간이라는 숙주를 통해 그 DNA를 이어가는구나 했다. 움베르토 에코 향년 84세였다.


 에코는 예로부터 지식인계의 먼치킨으로 불렸다(혹자는 에코의 저서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월리엄 수도사와 호르헤를 합치면 에코가 나온다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서 퍼스널 컴퓨터까지, 그가 가진 지식의 촉수가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는 그의 지적 광대함과 치열함은 내게 언제나 큰 자극이었다. 지식의 영역에 있어서 그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거인 같았다.


 에코는 죽은 뒤에도 거구의 흔적을 남겼다. 그가 남긴 방대한 서적들은 죽기 전까지 끝내지 못할 숙제와도 같았다. 대신 움베르토 에코라는 사람 자체를 알고 싶었다. 어쩌면 그가 남긴 책들보다도 지성인으로서의 그를 좋아했던 것 같다. 다음은 에코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이다. 그에게 놀랍다는 말은 빼겠다. 그는 움베르토 에코니까.






1. 에코(Eco)의 기원


 1932년 이탈리아 서북부의 피에몬테주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인쇄업자, 아버지는 회계사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본래 출신을 모르는 고아였다. 그를 발견한 시청 관리가 그에게 성(姓)과 이름을 지어주었다. 에코라는 성은 ‘하늘이 내려준 재능’(ex caelis oblatus)이라는 라틴어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이후 그의 할아버지는 인쇄업자에 종사하고(움베르토 에코가 괜히 책을 좋아했던 게 아니다) 자식을 열셋 명을 낳는다.


 움베르토 에코는 어린 시절 가톨릭 계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변호사가 되길 원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토리노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세 철학과 문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1954년 그의 나이 22살에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설적으로 그는 이때 성당을 그만두고 무신론자가 되었다.



2. 한 번 읽은 책은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


  그는 24세 때부터 저술 작업을 시작해 죽을 때까지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열정적인 작가이다. 그의 방대한 저술 능력은 그의 비상한 기억력에 기반하는데 본인이 교수로 재직하던 볼로냐 대학 도서관의 모든 책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한 번 읽은 책의 내용은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을 가졌다고 말한 바 있다.

실내는 금연구역 아닌가요...

그는 나이를 모르는 왕성한 기억력과 독창성의 비결로 독서를 말한 바 있다.

“언제나 젊은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데, 책을 읽으면 기억력이 좋아지고 엄청나게 다양한 개성을 개발할 수 있답니다. 삶의 마지막에 가서는 수없이 많은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그건 굉장한 특권이지요.”


 그래서 그의 별명은 ‘세상의 모든 지식’(네이버 지식인…). 그가 여러 분야의 학문과 문학을 넘나들며 동시에 정통할 수 있었던 그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파리에서의 인터뷰에서 에코는 그의 실천 원칙을 알려줬다. ‘빈틈과 틈새의 활용’이다. 우리의 삶은 빈틈으로 가득 차 있고, 그를 인터뷰하러 오는 기자가 1층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5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오던 잠깐의 ‘틈새’에도 사유 연습을 했다는 것.



3. 트위터 자기 소개란

‘중세 학자, 철학자, 기호학자, 언어학자, 문학비평가, 소설가. 단, 르네상스맨은 아님’ - 움베르트 에코 트위터 자기소개란
@umbertoeco_ 참고로 그는 SNS를 싫어했다

 그의 공식적 직업은 그의 트위터 자기소개란에 적혀 있듯이 중세 학자, 철학자, 기호학자, 언어학자, 문학비평가, 소설가이다. 하지만 그는 그 이외에도 이탈리아 라디오텔레비전(RAI)에서 문화 담당 편집자로 일한 바 있다. 토리노 대학 및 볼로냐 대학은 물론 밀라노 대학, 소로본 대학, 예일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던 교수였으며, 40여 개의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다.


 하지만 그는 한 인터뷰에서 그중 딱 한 가지 만을 택해야 한다면 자신을 ‘철학자’로 간주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인생의 어느 한 순간에 기호학을 갖게 된 철학자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으로서 먼저 미학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를 중세 미학에서 시작했고 현대 미학으로 관심의 폭을 넓혔다. 그때 그는 아방가르드와 대중예술분야 이 두 가지 층위를 연구하던 중 이 두 가지 양상을 설명하고자 ‘기호학’을 활용하였다고 한다.

The Worlds of Umberto Eco


 그는 현대 사회가 소프트웨어의 세계, 즉 가상의 세계로 변하고 있다고 보았고 그래서 퍼스널 컴퓨터와 미디어의 변화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저널리즘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좋은 저널리즘이 있어야 사회가 유지된다고 보았다. 그가 유일하게 건들지 않은 한 가지 영역은 경제학이라고 한다.



4. 살아 있는 구글 번역기


 그는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 에스파냐어까지 통달한 언어의 천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이래 최고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라 불렸다.


 그는 9개 언어에 통달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장미의 이름> 원본의 작가 소개에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까지 해독하는’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를 보아 그는 9개 언어데 대해 문자를 읽어 해독하는 수준이었던 것은 확실 한 듯하다. 다만 모든 언어에 대해 원어민 수준으로 대화가 가능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그는 영어와 프랑스어로 강연을 한 바 있다.



5. 도서관의 도서관, 책덕 중의 책덕

“내 이 세상 도처에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 장미의 이름 중

 본인 스스로 ‘거대한 도서관’이라고 불렸던 에코는 실제로 약 5만여 권의 장서를 보유한 서재를 보유하고 있었다. 밀라노 자택 서재에 카발라, 연금술, 마법, 다양한 언어들에 대한 고서들이 있다. 그는 책이 삶을 연장시킨다고 믿고, ‘책의 우주’를 유영하며 살았다. 그는 구텐베르크 성서 초판본을 손에 넣는 게 꿈이었던 고서 수집가이기도 하였다. 아래 동영상은 그의 방대한 서재를 보여준다(아직 못 본 사람은 꼭 보기를 바란다).

그의 서재는 에코를 닮았다. 아니 에코가 서재를 닮은 것인가.

 그는 무엇보다도 수많은 책들을 꾸역꾸역 읽는 독서광(흔히 말해 책덕후)이었다. 그는 책은 불가능한 여러 겹의 삶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했는데, "책은 불사(不死)를 위한 약간의 선금"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어느 기자가 그에게 인터넷과 전자책 등등 새로운 ‘종이책’들을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까?라고 묻자 에코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는 책 보다 더 나은 ‘반영구적 저장 매체’를 만들 수는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루브르 박물과 난간에서 소설책과 킨들 전자책을 함께 집어던진 바 있다. 난간에서 떨어진 킨들은 박살나 켜지지 않았지만 책은 단순히 몇 페이지 구겨진 정도였다. 이처럼 그는 아무리 기계가 발달해도 종이로 된 텍스트가 사라지지 않을 것을 행동으로 증명했다.

부서진 킨들과 구겨진 책

하지만 그런 그도 컴퓨터, 인터넷, 아이패드를 즐겨 썼다고 한다.



6. 대한민국에서의 움베르트 에코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책이지만 1980년에 출간된 <장미의 이름>이 한국에 상륙한 것은 1986년 5월이다. ‘열린책들’에서 고 이윤기 선생의 피나는 노력(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기독교의 분파만 해도 수가지이며 언어의 종류만 해도 7가지이고 그 당시에는 인터넷이나 위키피디아조차 없었다)으로 번역된 이 책은 초판이 판매되는데 몇 년이 걸릴 정도로 초기 반응은 미온했다.

故 이윤기 선생님

 하지만 1989년, 숀 코너리가 주연한 영화 <장미의 이름>이 한국에 개봉한다. 영화의 개봉은 이 소설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중세 수도원의 비밀과 신비에 빠져들었고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중세 문명 등등에 엄청나게) 해박한 볼로냐의 기호학 교수에 주목한다.


 에코의 소설은 이전까지 한국 도서 시장을 휩쓸던 영미권 대형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서서히 뚫고 유럽권 소설이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장미의 이름>은 이후 한국 문학의 소재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누구나 이름은 들어봤을 <장미의 이름>.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책이다

 사실 대한민국에서의 <장미의 이름>의 번역은 일본(1990) 보다 앞선 것이었으며, 에코의 모든 책이 번역된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이다. 에코의 저술 중 비소설 26권을 묶은 <에코 마니아 컬렉션>은 이탈리아는 물론 유례없던 없던 시도였다. 이는 에코의 모든 책을 출판해온 이탈리아의 봄피아니 출판사에서도 시도하지 못했던 일이다.


 2002년 계간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서 그는 개고기 문화를 비판한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에 대해 ‘파시스트’라고 비난하며 한국 독자들의 큰 갈채를 받았다.



7. 죽음

“작품이 끝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 죽음으로써 그 작품의 해석을 가로막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

 그는 2016년 2월 19일 금요일 밤(현지 시간 22시 30분) 향년 84세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밀라노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그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암. 가족들은 부고를 이탈리아 신문 라 레푸블리카(La Republica)에 알렸다. 장례는 2016년 2월 23일에 밀라노에서 치루어졌으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전 세계 팬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생전에 굉장한 골초였다. 노년에는 금연을 했고 대신 위스키를 즐겨 마셨다.

 2015년에 출간된 에코의 일곱 번째 이자 최후의 소설인 《창간 준비호(Numero Zero)》는 오는 6월 열린책들에서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지식인들의 등불과도 같았던 고인의 명복을 빈다.




참고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16063&cid=40942&categoryId=34428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2/26/2016022601220.html

http://namu.mirror.wiki/w/%EC%9B%80%EB%B2%A0%EB%A5%B4%ED%86%A0%20%EC%97%90%EC%BD%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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