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11
기이한 일이었다. 나카무라 유리코의 곡의 첫 소절을 듣자마자 문주가 나타났다. 태생을 가늠케 하는 노란 기운의 맑은 피부, 따로 손질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풍성한 머리칼, 어딘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이는 눈커풀과 쉽사리 입을 뗄 것 같지 않은 무거운 입술, 작가들이나 즐겨 입을 법한 평범한 남색 원피스와 조금은 야윈 팔다리까지. 그녀는 마치 세상의 모든 풍파를 이겨낸, 끝이 무뎌진 사람인 것만 같았다. 무엇인가를 초월한 그런 사람.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스쳐지나간 그녀의 모습을 기록하는 건 내게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내 마음에 무언갈 남기고 간 인물의 조그만한 정보 하나하나가 내겐 매우 소중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진실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그녀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것도, 소스라칠 만큼 구체적이고 생동감있게 보여졌다는 것도 놀라웠다. 이는 내가 그들의 세계에 깊이 빠져 함께 호흡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좋다 나쁘다의 표현으로 기분을 묘사할 순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애틋한 감각이 마음 속에 피어 올랐다. 그리고 나카무라 유리코의 음악을 들으면 언제든 문주를 소환해낼 수 있다는 생각에 한편으론 든든하기도, 한편으론 조금 외롭고 서글퍼졌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비록 그녀의 이야기는 하단에 숫자가 적힌 몇 장의 종이더미 속에서 매듭지어졌지만 나는 문주와 우주가 앞으로 더 평화롭고, 온화한 삶을 이어가길 바랐다. 그런 마음이 꽤나 강한 힘을 지니고 밀려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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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 뒤에야 마땅히 기대할 수 있는 맑은 기운이 하늘을 맴돌았다. 매미는 여전히 우렁찬 목청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세상은 가을의 기운으로 메워졌다. 맑고 시원한 바람, 높고 청명한 하늘, 그리고 조금은 더 괜찮아진 내 마음까지. 마치 우주가 가을의 전초를 보여주는 듯했다.
작년부터 가을이라는 계절을 사랑하기로 했었던 것 같다. 탄생과 쇠퇴가 공존하는 만물의 계절. 무엇하나 특별하고 돋보이는 기운없이 온전히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시간. 아마도 올해는 더 진지한 마음으로 가을을 사랑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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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낯선 의미들과 친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가령 만나자는 사람들을 마다하지 않는다거나 내 기준에서는 꽤나 열린 마음으로 , 이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곳으로 떠난다거나. 물론 누군가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 있겠지만 나에겐 꽤나 큰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직은 영 어색하다. 하지만 더 나은 세상에 가닿기 위해선 알을 깨고 나오는 투쟁이 필요하고, 크고 작은 경험의 다발이 곧 건강한 삶을 일궈 나아간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딜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에 가닿기 위해 천천히 발을 내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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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를 타고 종각역으로 가서 지하철로 갈아탈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버스 정류장은 쉽사리 보이지 않았고, 평소 예민하던 방향감각도 뭉툭해지는 바람에 돌연 이방인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밤하늘에 우두커니 떠있는 듯한 표지판으로 방향을 가늠해보며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익숙한 거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방인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버스정류장은 보이지 않았고, 이럴 바엔 걸어서 종각역까지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계획에 없던 밤산책이 시작됐다.
앞서 '익숙한 거리'라 표현했지만 사실 많은 추억이 깃든 거리라 표현하는 게 더욱 적절했다. 분명 나쁜 기억은 없었지만 상기하는 것또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에 애써 밀려오는 생각을 차단해야만 했다. 그때 마침 미팅 도중 전화를 걸어온 엄마 생각이나서 부리나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밀려온 야릇한 추억을 꽤나 매몰찬 방식으로 차단해버렸다.
둔포는 비가 많이 오진 않았는지 안부로 시작해 아가들이 말썽을 피우진 않았는지, 몸은 괜찮으신지 시시콜콜한 질문과 답변을 이어갔다. 그렇게 하염없이 거닐던 도중 돌연 소록소록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더니 얇았던 빗줄기는 자비없이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무슨 배짱인지 우산도 챙기지 않았던 나는 여지없이 밤거리를 뛸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서울역사박물관부터 종각역까지 쉬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요즘 꾸준히 운동을 한 덕택인지 숨은 가빠오지 않았다. 되려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뛰었는데 엄마는 뛰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그만큼 내 호흡은 안정적이었고, 대화도 물흐르듯 잘 이어갔다는 의미겠지. 평소같았다면 육체적으로 강해진 내 모습에 흐뭇하기에 바빴을테지만 오늘은 얼마되지 않는 몇십분동안 다양한 상황을 지났다는 사실이 조금은 재밌게 느껴졌다. 헤맬 이유가 없었던 서대문에서의 방황과 익숙한 거리 위에서 마주한 기억, 갑자기 쏟아진 빗줄기와 엄마와 통화를 하며 뛴 밤거리. 계획에 없던 밤산책은 불쾌함과 거리가 먼 경험이었다.
어떤 상황과 감각이 이 에피소드를 글로 옮길 만큼 강한 중력을 지녔는지는 가늠할 길이 없었지만, 이 거리 위에서 스쳐지나갔던 모든 감정과 경험 중 버리거나 지우고 싶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가 분명 내게 소중한 의미였다. 그렇게 대단치도 않은 일련의 시간이 또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