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mage
문득 내가 딛고 있는 현실을 돌이켜 본 아침.
*
더 쉬어도 괜찮은 주말 아침이었지만 애써 천근같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성격이 모난 편이라 침대에서 뒹구르는 일을 극히 싫어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오전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는 건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꾀죄죄한 모습으로 아침을 맞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예전에 비해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족히 20년은 넘은 아파트 인테리어는 내가 원하던 대로 꽤나 깔끔하게 리모델링했고, 번잡한 과정 없이 버튼 하나만 누르면 편안한 재즈 선율이 집안을 가득 메웠다. 잠이 덜 깬 정신 속에서도 습관처럼 좋아하는 원두를 집어 커피를 내렸고, 매트하고 윤이나는 가죽소파에 걸터앉아 카페인의 힘을 빌려 아침을 깨웠다.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목표를 이룰 수 있던 나는 이전과는 다른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란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어쨌든 삶이 편해진 건 사실이었다. 물론 일말의 성취가 늘 호재만 가져다 주는 건 아니었다. 반대로 그만큼 삶에 대한 책임감도 몇배로 늘었다. 이전엔 나 하나만의 목표만을 위해 달렸지만 이젠 뜻을 함께 나누는 이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대략 나를 제외하고 13명 정도. 그들의 삶을 책임진다는 표현은 거창하지만 어쨌든 대표라는 직함은 예상했던 것에 비해 훨씬 더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다. 물론 그 일말의 책임감은 내 삶의 건강한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했지만 때론 크나큰 부담감으로 다가온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경제적인 여유가 생겨 삶이 조금 더 편안해진 반면 한편으론 더 치열해진 것도 사실이다.
*
오래간만에 맑게 개인 아침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BJ 크루즈를 대신해 지하철을 타야될 것만 같았다. 종착역은 익숙한 거리. 조금 남은 커피를 급히 해치우고, 깨끗하게 씻은 뒤 주섬주섬 편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들고 다니기 간편한 가방을 꺼내 습관처럼 다이어리와 포터블 배터리, 그리고 책 한 권과 핸드크림을 챙겼다. 오늘은 셔플대신 직접 선별한 음악들을 꼭 들어야 할 것만 같아 블루투스 이어폰 대신 낡은 헤드폰을 챙겼고, 평소 아무 생각없이 습관처럼 뿌리던 향수를 대신해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던 향수를 뿌렸다. 정신없이 흘려 보냈던 최근 일상과는 다르게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싶었던 탓이다. 방을 나서기 전 잊지 않은 것은 없는지 디시 한번 확인한 뒤 다 낡은 반스를 신고 집을 나섰다.
높은 하늘과 어울리는 적당한 바람, 기분 좋은 공기가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모자를 쓰지 않은 덕에 눈이 부시긴 했지만 오래간만에 쬐는 햇볕이라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지하철역을 향하는 길. 몇십 년을 살았던 동네인지라 낯설 이유는 없었지만 너무 오래간만에 거닐은 탓인지 괜히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고 나는 그저 익숙한 듯 빠른 발걸음으로 지하철역을 향했다.
주말인지라 지하철엔 사람이 많았지만 그다지 불편하진 않았다. 평소에 늘 앉아만 있다 보니 서있는 게 좋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도록 문쪽에 붙어섰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다소 직관적으로 새로운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어 오늘 들을 음악들을 생각나는 대로 담았다.
*
종각역 1번 출구.
일상과도 같았던 거리였지만 너무 오래간만에 다시 찾은 이 곳. 조심스레 헤드폰을 끼고 방금 완성한 플레이 리스트를 하나둘씩 꺼내 듣기 시작했다. 음악이 흘러나오자 새삼스럽게 현실이 직시되기 시작했다. 집을 나선 후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이 찰나에 이뤄진 듯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종각이었고, 사실 오늘 왜 이곳에 왔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찰나에 일어난 강한 본능 때문이었다고 해야 할까. 거스를 수 없었던, 혹은 거스르기 싫었던 본능. 오래간만에 맞은 여유로운 주말이었지만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본능에 이끌려 내 몸을 혹사시키고 있는 듯했다.
종각역 1번 출구로 나와 쭉 직진해 광화문으로 향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지만 오늘은 청계천 쪽으로 향했다. 오늘 같은 날 청계천엔 봄날같이 따듯하고 생기있는 광경이 가득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풍문고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차 없는 거리를 거닐며 아래 청계천을 바라보았다. 얕은 수심이지만 청계천은 부서지는 햇발을 끼고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다. 날이 좋은지라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고, 사이가 좋아보이는 연인들도 북적였다. 예상했던 대로 청계천은 다정해 보이는 일상들로 즐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돌연 기분이 이상해졌다. 앞에 놓인 풍경은 분명 아름답고 따듯한데 어쩐 일인지 내 마음은 그에 상반된 외로움이 사무쳤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절묘하게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 Johann Strauss II : An Der Schonen Blauen Donau Wallz Op.314>의 클래식 피아노 버전이 헤드폰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호흡이 느린 세상과 잘 어우러지는 멜로디였지만 오늘은 이 곡이 따듯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되려 세상과 단절된 나를 더 도드라지게 만드는 듯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길거리로 나와 예상치도 못한 쓸쓸함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
쓸쓸함이 내 마음을 물들이고 있던 찰나 문득 놓치며 살아가는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에 치여, 그 대단하다고 여기는 책임감에 치여.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평화로워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출처모를 외로움을 느꼈고, 따듯한 온기가 흐르는 세상이 나와는 관계가 없는 세상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유독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멜로디는 아름답기보단 적적하게 마음에 와 닿았던 것 같다. 외로움에 익숙한 나였지만 오늘만큼은 견디기 어려운 사무침이었다. 평소같았다면 외로움의 흐름에 마음을 맡겼겠지만 지금은 이 감정선을 벗어나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황급히 걸음의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걸음이 느려진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세상, 마음으로 느끼는 세상은 조금씩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 의식하지 못한 자리에 피어난 꽃이나, 맑은 물 사이로 헤엄치고 있는 작은 물고기 무리, 오순도순 이야기를 하며 떠들고 있는 젊은 연인들. 비록 나와 관계된 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방금 느낀 비극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슬픔이 조금은 옅어지는 듯했다. 이유는 알 이유가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눈이 시큰해졌다. 하지만 굳이 눈물을 흘릴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가슴속에 벅차오르는 이상한 기분을 애써 꾹 눌러주었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발걸음은 계속 느린 속도를 유지했다. 평소 같았으면 마음이 급해 이 걸음 속도는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오늘만큼은 느린 속도로 세상을 찬찬히 들여다 보며 내 마음을 달래줘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 나는 무엇보다 내가 딛고 있는 세상을 천천히 감상해야 할 것만 같았다.
*
청계천 끝자락에 닿았을 때쯤, 광화문으로 향하기 위해 오른쪽 길로 드러섰다. 빌딩 숲이 우거진 덕에 거센 바람이 불어 닥쳤지만 아무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냥 이 순간 또한 나의 몫이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큰길에 닿았을 때쯤 햇발이 내리쬐는 건너편 화장품 매장 쇼윈도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봄과 어울리는 싱그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한 여성의 얼굴. 나도 모르게 잠시 걸음을 멈춰 섰다.
내 시린 마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세상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나와 그녀의 사진 사이로 많은 차들이 제 속도를 따라 달렸고, 많은 사람들은 따듯한 햇발을 즐기며 행복한 얼굴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사진과 나만의 세상만 멈춰선 기분이었다. 비록 그녀를 직접 마주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사진만 바라봐도 괜스레 마음이 일렁였다.
물론 이 일렁임이 설렘인지 절망인지 알 길은 없었다.
멀뚱히 쇼윈도를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광화문으로 향했다. 이미 쇼윈도에서 시선을 뗐지만 마음속엔 그녀의 잔상이 깊게 남아 있었다. 마음 속에 일렁이는 감정이 설렘이길 바랐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 자신이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나를 탓할 일이 아니었지만 마땅히 탓할 곳이 없었다. 아파도 나혼자만 아프고 싶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미워할 순 없었다.
잠시 시선을 땅에 떨군 채 길을 걷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다시 앞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했다. 비록 짧은 거리를 걸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을 바삐 움직인 탓에 몸과 정신이 피로해졌다. 커피가 필요했다. 몽롱해진 정신과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바로 카페로 향하려고 했지만 저 멀리 광화문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인 탓에 애써 외면할 순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길을 건너는 대신 광장을 걷기 시작했다.
점점 광화문이 가까워질수록 반가움보단 간절함이 앞섰다. 그 간절함은 광화문을 향한 간절함이 아니었다. 일종의 헛된 희망이랄까.
갑자기 누군가 내 축 처진 어깨를 툭 건드렸을 때. 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처럼, 정말 운명과도 같이 마주할 수 있었으면.
맥락과 맞지 않는 상상이었지만 아까 그녀의 흔적을 마주한 뒤로 온통 내 머리와 마음은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싱그럽게 웃고 있던 그녀는 지금 이 시간에도 아름답게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그 외에는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일한 마음의 빈틈에선 조금 일그러진 얼굴과 수척한 마음으로 광화문을 거니는 나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내 마음속에 그려진 나와 그녀는 같은 길을 걷고 있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길거리로 나선 것과는 별개로 조금은 우울하게 가라앉은 마음. 하지만 나는 오늘 하루를 나락으로 마무리 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와 같이 냉철한, 혹은 굳은 마음으로 쓸쓸함을 털어버리고자 했다. 마치 이성이 감성을 낭떠러지로 밀쳐내듯이. 너무나도 추상적인 일이었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감상에 젖는 순간을 떨쳐 내는데 익숙했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뒤, 폐 끝까지 가득 찬 공기를 떨리는 마음으로 조금씩 내뱉었다. 더 이상 뱉을 숨이 없음을 느꼈을 때 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본 목적지였던 카페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
좋은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게 카페는 한적했다. 그 덕에 기다림 없이 커피를 시킬 수 있었고, 센스있는 바리스타는 내 주문을 듣고 바로 콜드 브루를 준비해주었다. 평소 같았다면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지만 계산과 동시에 커피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3층 창가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가방 속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오늘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대신해 시라토리 하루히코의 <니체의 말>을 챙겼다. 집을 나설 때 어떤 책을 챙길까 찰나동안 고민을 했지만 본능적으로 이 책을 선택했다. (지금 내 마음가짐을 살펴보았을 때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미 두 번은 정독한 책이었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많은 위로를 얻곤 했다. 가끔은 너무 치열하게 살아가는 나 자신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때, <니체의 말>을 읽고 있으면 그래도 나와 비슷한 세상을 가진 사람이 존재한다는 일말의 동질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동질감은 내가 외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고 이 위로는 결국 스스로를 위로해줄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사실 허무주의, 실존주의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가 없어도 니체의 글은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니체가 극단적인 철학가라기 보단 예술가에 가까운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극히 이성적인 것 같으면서도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엔 인간으로서의 감성이 느껴졌던 것도 일종의 동질감으로 느껴졌다. 비록 나는 니체처럼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니체의 사상을 동경하는 사람으로서 동질감을 느끼는 건 매우 설레는 일이었다. 나는 늘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위로하고, 나를 힘겹게 만드는 일말의 감정들을 깨끗하게 정리하곤 했다. 그렇게 나는 세 번째 <니체의 말>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
정신없이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6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바깥세상엔 햇발이 가득했다. 해가 꽤 길어졌나보다. 정신을 차려보니 꽤나 허기지기 시작했고, 이젠 슬슬 집으로 향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주섬주섬 짐을 다시 싸고 카페를 나섰다. 길거리엔 붉은 노을 한두 방울이 섞인 햇발이 가득히 퍼져 있었다. 아직 어둠이 내려앉지는 않았지만 카페에 들어왔을 때와는 다른 공기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고 나는 귀로에서도 어김없이 같은 플레이 리스트를 꺼내 들었다.
플레이 리스트를재생한 순간 실수를 범했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린 듯했다. 플레이 리스트의 첫 멜로디를 듣자마자 이성적인 말들로 무자비하게 잠식시켰던 내 마음은 진정이 무색하게 다시 일렁이기 시작했다.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좋아하는 말들로 머릿속을 채운 일이 무의미 해진 순간이었다. 그래, 나는 그때 깨달았다. 억지로 마음을 다잡는 순간들을 제외하곤 온통 그 생각뿐이란 사실을. 삶을 대하는 치열 태도와 일말의 책임감, 그리고, 그녀.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은 아주 잠시뿐이었고 나를 사로잡는 어른스러운 생각들과 온통 그녀만으로 뒤범벅된 복잡한 덩어리가 내 일상과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내 마음을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녀가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애써 부정할 수 없는 감정의 밀물이란 무엇인지 체감할 수 있었던 순간. 나는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잃기 시작했고, 두 가치의 공존에 대한 나의 보수적인 생각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솔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