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mage
조심스레 불어오는 바람에도 벚꽃이 흩날리는 밤.
*
하늘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자 하나둘씩 길을 밝히기 시작하는 서울. 벚꽃잎이 흩뿌려진 난간에 나란히 앉아 말없이 서울 야경을 바라본다. 무심하게도 밝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서울은 강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나는 잘 보이지도 않는 좁은 서울의 거리들을 구석구석 살핀 답 치고 눈앞에 놓인 광경을 응시한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다. 우리의 주변은 침묵으로 둘러 쌓여 있었지만 마치 서로가 할 말이 있지만 애써 삼키는 듯한 간지러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래서 침묵이 어색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색적이지만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녀를 지나 내쪽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봄이 내뿜는 특유의 생기 더불어 그녀의 향기까지 온전히 실어다 주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무 말 없이 도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 순간이 충분하게 느껴졌다. 아니, 이보다 더 충분한 일은 없을 것이란 다소 과도한 안일함까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냥 이 순간이 좋았다는 말이다.
먼저 입을 뗀 건 그녀였다. 그 순간이 다소 어색하게 느꼈는지 분위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애써 평범한 질문을 하는 듯했다. 나 또한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가볍게 질문을 맞받아쳤고, 우리는 조심스럽지만 활기가 있는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찰나의 침묵이 이어졌다. 마치 화제가 전환이 되어야 한다는 신의 개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절묘한 고요였다. 두 번째로 찾아온 침묵은 내가 깨야만 할 것 같아 마음을 몇 번이고 다잡고 있는 와중에 그녀는 자신의 발끝을 보며 내게 다른 질문을 이어갔다. 이번엔 조금 더 무거운 주제의 질문이었다.
단순했지만 그만큼 심도가 있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만큼은 편안한 자세로 답변해줄 수 없던 나는 잠시 입을 앙다물었다. 그녀는 마치 내게 바라는 대답이 있는 눈치였지만 사실 그 질문은 특정한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다소 조심스러워 보이는 그녀를 되새김질하며 질문에 성심성의껏, 차분한 마음으로 답해주었다.
대답을 하는 동안에도 나의 시선은 오로지 서울 야경을 향하고 있었다. 비록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가 날 바라보고 있음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조금씩 대답에 쉼표를 넣어가며 말을 이어갔고, 마치 준비해 온 멘트인 양 천천히 그리고 끊김 없이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가 비집고 들어오지 못할 만큼 이야기를 장황하게 이어갔지만 그녀는 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하나하나 모두 귀담아 들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긴 이야기 늘여 놓는 동안 단 한순간도 나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말을 하는 도중에도 희미하게나마 부담을 느꼈지만 나는 최대한 건강한 답변을 내놓기 위해 집중하며 애를 쓰고 있었다.
나의 장황한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었다. 막상 말을 다하고 나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기도 어려울 만큼 어렵고 장황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긴 이야기에 대해 맞장구를 쳐주었고, 끝내 진심을 담은 칭찬을 내게 건네주었다. 물론 칭찬을 받고자 했던 말은 아니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마음이 불편했다. 잘난 척을 해버린 것만 같아서. 아직 이루지 못한 걸 마치 갖고 있는 것처럼 말해버린 것 같아서. 하지만 이게 나였고, 그녀 또한 이런 나를 썩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지극히도 어른스러운 말을 늘여놓은 건 나였지만 정작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 건 내가 아닌 이런 장황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그녀였다. 꽤나 나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했던 내게 그녀는 나보다 더 넓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 느껴졌지만 시기나 질투를 대신해 나는 그녀에게 적지 않은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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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야경을 함께 바라볼 수 있단 사실이 행복해."
그녀와 나 사이에 다시 놓인 정적을 깬 나지막한 한마디.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외마디였다. 사실 그녀가 했다면 더 아름다운 작품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나의 본능은 차선의 작품을 만들어 주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로맨틱한 말이었기 때문에 내겐 최선의 그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언젠간 해야 할 것만 같았던 이 단순 하디 단순한 말을 하기 위해 수천번, 수만 번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고 예행연습도 했었다. 다소 급하게 한 감이 있었고 그다지 화려한 말은 아니었지만 내 진심을 담아낸, 내가 할 수 있는 나름의 최고의 표현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 또한 무슨 용기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처음으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내 눈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나의 눈을 신비롭게 바라보았고, 나는 쉽사리 그 눈길 교환을 견딜 수가 없어 다시 엄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잠시나마 어리숙한 나 자신이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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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라서인지 남산길은 한적했다. 흩뿌려진 벚꽃잎과 칼 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가로수들, 그리고 드문드문 우리 곁을 지나가는 버스와 우리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 불빛. 말없이 차도 쪽에서 걷던 나는 그녀가 내게 했던 똑같은 질문을 그제야 그녀에게 물었다. 너무 늦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사실,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한건 난생처음이었다. 나는 그만큼 이기적으로 살았던 사람이었다. 나름 큰 용단을 갖고 질문을 한 내 마음에 비해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은근 조잘조잘 말이 많았던 나는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 간섭을 하고 싶고, 맞장구를 쳐주고 싶어 마음이 간지러웠지만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는 그녀의 이야기를 끊지 않기 위해 끝까지 인내했다. 어쩌면 대화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태도일지도 모르지만 내겐 이 인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는 그녀.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그녀의 대답은 매우 소담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소담함이 그녀와 매우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 어우러짐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녀 또한 요즘 보기 드물게 깊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의 직업 특성상 뭐든 가볍게 여길 것이라 생각했던 나 자신이 상당히 창피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이미 남들이 탐하는 대단한 점을 많이 지니고 있었지만 되려 그녀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그 무언가에 연연하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본질적인 것에 더 집중하고자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녀의 그런 진중한 모습이 좋았다. 단순히 화려함을 미뤄두고 소박함을 즐기는 특이한 성향이 좋았다기 보단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화려함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이미 통찰하고 있다는 것. 나는 그녀의 통찰력이 좋았다. 그녀는 수수하지만 정말로 멋진 여성이었다.
*
희희낙락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꽤나 차분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우린 헤어졌다.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냐는 질문을 백번 정도 삼켜야만 했다. 해본 적이 없어서. 애써 무기력한 마음을 감추고 헤어짐을 고할 때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내게 한마디를 건넸다.
"연락할게."
이 한마디를 위해 오늘 이 긴 시간을 견뎌온 느낌이었다. 비록 이 단순한 외마디조차 건네지 못한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론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표정만으로 그녀의 외마디에 답했다. 그리고 그녀가 귀가하기 위해 버스를 타는 모습까지 보고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지하철역까지 걸어갔지만 사실 내 마음속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지하로 내려가는 길, 그제사야 나는 원숙한 모양새를 가진 것과는 다르게 어린아이 마냥 신나는 마음을 부둥켜안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한강진역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