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작가 Jul 05. 2018

엄마의 삶엔 ‘나’가 없다

나는 엄마의 소유물이 아니다. 누구도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엄마는 너밖에 없어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한때는 이 말이 애정 가득하게 들리기도 했다. 내가 미쳤지. 이 말이 이토록 끔찍한 말이었다니. 들을 때마다 가슴이 갑갑한 게 도망치고 싶었다. 팔, 다리가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 인형처럼. 엄마가 미리 짜 놓은 각본에 의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원하지 않는 춤. 비록 내가 울고 있더라도 춤은 계속 이어졌다.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안다, 나도. 그런데 그 선택이 오로지 내 의사가 아니라면? 또 내가 한 선택이 나뿐 아니라 누군가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면? 책임감에 부담감까지 더해진다.(가뜩이나 책임감만으로도 무거운데!) 내 손에 쥔 자동차 키. 이 차로 어디든 갈 수 있다. 방향도 속도도 나의 자유다. 내가 그린 로드맵으로 여행을 떠나려던 찰나. 조수석에 앉아 나를 감시하는 눈초리를 발견했다. 엄마다. 오롯이 나 혼자 운전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심지어 내가 그린 지도의 한 귀퉁이를 지우고 있었다. 말도 없이. (엄마, 이 차 내 차 맞아? 확실해? 근데 왜 그래?)


나의 하루는 ‘나’에 의해 만들어진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본 풍경, 내가 한 생각들… 그 하루가 쌓여 기나긴 인생이 되면 비로소 ‘나’가 완성된다. 엄마는 그런 나를 깡그리 무시했다. 꼭두각시 인형처럼 나를 조종하길 원했고, 그대로 움직여주길 바랐다.


엄마에게 이 말은 ‘필살기’였다. 내가 본인이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마다 이 말을 써먹었다. 이 필살기는 참으로 강력했다. 듣는 이의 죄책감이나 일말의 효심을 정확히 자극한다. 필살기가 입 밖으로 내뱉어지자마자 듣는 이는 두 손 두발이 꽁꽁 묶인 듯 마음이 약해져 버린다. 마음속을 파고든 필살기는 주문을 외우기도 한다. ‘착한 딸이라면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하지 않겠니?’ 결국 결정을 번복하기까지 도달한다.


“내 딸은 정말 착해. 엄만 너밖에 없어” 

나에게도 꿈이 있었다. 우주를 좋아했던 나는 NASA 연구원이 되고 싶었다. 부모님의 기대 앞에 처참히 무너지기 전까진. 그들은 내가 가정학과나 사범대로 진로를 선택하길 바랐다. 여자가 가방끈 길어 뭐하냐며 그저 좋은 간판 하나 달고서 시집만 잘 가면 장땡이라고.

부모님은 가족들을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으셨다. 꽤 오랜기간 이발소를 운영하셨다. 공사판 옆, 다 쓰러져 가는 건물 한켠에 마련된 곳. 자연히 주 이용고객은 인부들이었다. 아버지께서 이발을 하시면 어머니는 면도를 해주셨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 남편 하나 믿고 살아가던 어머니. 늘 싹싹하게 손님을 대하던 어머니는 강한 줄로만 알았는데. 나는 어느 밤 불 꺼진 부엌에서 남모르게 우는 엄마를 기억한다. 안쓰러운 맘이 들었던 걸까. 그렇게 나의 꿈은 서서히 지워졌다. 

나는 지지리도 착한 딸이었다. 철저하게 부모님이 원하는 딸의 모습으로 살았다. 세상 모든 부모님이 바라는 이상적인 딸. 부모님 말 잘 듣고 동생들도 잘 돌보는 아이. 덕분에 동네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 졸업하자마자 부모님이 정한 남자와 결혼하기까지. 그렇게 나는 어머니의 기대에 의해 만들어져 갔다. 사실 나는 둘도 없는 왈가닥 푼수였는데. 아무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나도 그때의 나를 모른다.


< 엄마의 어린 시절 >


엄마의 24시간은 단순하다. 집안일만이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다. 티가 나지 않아서 그렇지 엄연히 그녀의 일(JOB)이다. 나머지 시간엔 TV를 본다. 딱히 취미생활도 없다. 강아지마냥 남편과 자식들 귀가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 엄마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점점 그들에게 의지했다. 내 행복은 당신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엄마는 가족들을 위해 늘 희생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런 무지막지한 고통받길 주문한 적이 없는데. 손도 안 댄 갈비를 내 앞에 몰아주고, 본인은 정작 구멍 난 양말을 신으면서 매일 내 옷을 사재끼고. 본인은 이걸 사랑이라 부를지 모르나,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고문 내지는 부담이라는 걸. 자신도 새 옷 좋아하고, 없어서 못 먹는 갈비인데도. 


과연 세상에 엄마는 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는 걸까. 아닐 텐데. 엄마는 내가 공부에 뜻이 없다는 데도 대학원 진학을 강요했었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본인이 못 이룬 꿈이었다는 걸.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대체 네가 뭐가 모자라서. 



그녀의 삶엔 ‘나’가 없다. 모든 선택에 엄마 자신은 없었다. 오로지 남편 또는 딸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람. 딸이 대학원에 들어가 내 꿈을 ‘대신’  이뤄주고, 딸을 부잣집으로 시집보내는 게 ‘내 자존심(커리어)’을 높이는 것이라 믿는다. 


엄마는 할머니가 원하는 삶을 살고, 나는 엄마가 원하는 삶을 산다. 본인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딸한테 그대로 전달해 달성하길 기대하곤 한다. 대리만족. 그럼 나는 엄마의 삶을 사느라 포기한 나의 무언가들을 훗날 내 딸한테 또 강요하겠지. 엄만 너밖에 없어, 라는 끔찍한 말을 내뱉어 가면서. 누군가를 위해 포기하는 게 많아질수록 대신 선택한 것에 기대가 커지게 되고 곧이어 집착까지 돼버린다. 최악이다. 



엄마, 정신적으로 독립하세요 제발



착한 딸 노릇은 대물림된다. 억눌린 나의 욕망은 딸에게 전달되고 딸의 것은 그 딸에게 넘겨진다. 누군가 이 이상한 놀이를 멈춰야 한다. 엄마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낼 때, 그제야 모두가 행복하다는 걸. 그 단순한 걸 외면하고 자신이 아닌, 바깥으로 머무는 시선이 참 슬프다.


 



나는 엄마의 소유물이 아니다.  

나는 엄마의 또 다른 ‘나’가 아니다.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이다.

누구도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그렇게 살지 못한 엄마가 가엽지만,

그것도 그녀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굴레에서 이만 벗어나겠다. 


누구도 이 결정을 비난할 수 없다. 




@YogurtRadio



이전 14화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용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