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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작가 Jun 28. 2018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용기

‘다 지난 일이야’, 인정할 수 있는 용기만이 독소를 제거하는 특효약이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상처가 아물듯, 날이 개듯, 색이 희미해지듯 그렇게 그 시절의 악몽들이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아니, ‘기대했다’가 더 정확한 단어일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암흑의 돌덩이에 짓눌려 살았다. 누가 끄집어낸다고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내가 나가고 싶다고 해서 탈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과거에 갇힌 수감자였다.


아이는 책가방을 메고 있었다. 학교를 다녀온 모양이다. 아이는 집 앞 현관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문틈에 귀를 바짝 대본다. 실금 같은 틈새로 소리가 새어 나온다. 아이의 엄마다. 화가 난 엄마. 오늘도 아이의 엄마는 이유모를 화가 났고 누군가를 향해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 아이는 공포에 질린 듯 두근거림을 느꼈다. 이 집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걸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두 발이 먼저 알고 있었다. 갈 곳 없는 아이는 두어층 위로 더 올라갔다. 발걸음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비상계단에 주저앉아 간간이 들려오는 엄마의 고성을 무심히 들었다. 언제쯤 끝나려나, 만화영화 볼 시간인데, 하면서. 아이는 오늘도 무섭고도 슬펐다.


꿈이었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과 불안에 떠는 가슴. 꿈에서 깬다고 바로 현실이 되진 않는다. 공중에 붕 뜬 듯, 길게 늘어진 찰나의 시간 동안 여기저기 퍼진 혼을 되찾아온다.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 현실의 문에 다다르자 길게 늘어진 시간이 다시 제 속도로 흐른다. 정신은 현실로 돌아왔는데 마음은 아직인가 보다. 불안에 떠는 가슴을 부여잡고 꿈이었음에 기뻐하며 통곡했다. 소리 내 우는 것으로 현실을 다시금 절감했다. 괜찮다고, 그때 그 시간은 이제 끝났다고. 정말 끝났다고.


나도 저렇게 뛰고 싶다. 빵 들고 팔랑팔랑, 천진한 미소로.


우리는 수많은 기억들을 갖고 산다. 좋은 기억, 나쁜 기억, 시답지 않은 기억들까지… 이 모든 건 머릿속에 마련된 방 안에 하나씩 들어가 산다. 방 크기는 모두 제각각인데, 나에게 각 기억이 미치는 영향에 따라 그 크기가 정해진다. 애석하게도,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큰 방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의 ‘기억 저장고’ 속 내용물들은 왜곡된다. 왜곡의 방향은 대부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뀐다. 아마 그 이유는, 그래야만 우리가 지긋한 삶을 버틸 수 있기 때문이리라. 나를 지키기 위해 마련된 보호책. 나쁜 기억들 속 독소들이 빠지고 나면 잔뜩 부패되어 있던 방 크기도 줄어든다. 새로 생겨난 여백에는 또 다른 기억 저장고로 채워진다.


 

엄마 좀 봐봐. 오늘도 기분이 안 좋니?



그럼에도 방심은 금물이다. 그렇게 쉽게 물러날 나쁜 기억이었으면 그리 오랫동안 나를 물고 늘어졌을 리 없다. 독소가 든 방의 기운은 여전히 세다는 걸. 방심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나를 괴롭힌다는 걸. 부딪쳐야만 하는 갈등의 순간을 피하는 이유도, 나를 놀라게 해준다며 숨어있는 남자친구에게 소리치며 울음을 터뜨린 것도, 예기치 못한 곳에서 들려오는 큰 소음을 싫어하는 것까지. 이 모든 게 어딘가 남아있는 상처의 흔적이라는 걸. 난데없이 터진 지뢰에 큰 구덩이가 생겼다. 큰 폭발로 돌덩이가 사방으로 튀면서 주변에 크고 작은 흠집을 냈다. 고통의 시작이었던 큰 구덩이는 어느 정도 메워졌으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생체기들이 곳곳에 잠재되어 있었다.


감정에도 습관이라는 게 있을까? 유년시절의 악몽들이 남 얘기 같이 담담해졌음에도,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어두웠던 날들이 끝났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좀처럼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분노가 끓어오르기도 했다. 엄마와 딸의 친밀감이란 나에게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그녀가 눈 감는 그날에도 슬프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어이없는 걱정을 진지하게 해본 적도 있다. (모녀가 다정히 팔짱을 끼고 쇼핑하는 광경이란 누군가에겐 판타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어릴 적 나의 장래희망은 ‘어른’이었다. 엄마의 폭력에 맞설 만큼 대등해진 상태. 이 집에서 나가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합법적인 나이. 성인이 되자마자 그 꿈은 이뤄졌고 5년간 집을 떠나 있었다. 부모님에게 애착이 없는 나를 남들은 이상하게 바라봤고, 나는 그들에게 어깨를 으쓱거림으로써 답을 대신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이 집 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저 엄마-딸이란 이름표를 달고 기본적인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여전히 마음의 문은 굳게 닫힌 상태다. 간간히 발견하는 상흔에 힘겨워하기도 한다.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상처 안에서 울먹이기만 하진 않는다는 것. 또 내가 놀라울 정도로 괜찮아지고 있다는 걸. 스스로 입을 열게 된 어느 날을 기억한다. 감정적으로 고조된 억양이 아닌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맥을 짚으며 그날을 돌이켜본다. 잔뜩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듯 천천히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악몽이 피한다고 없던 게 되는 건 아니니까, 그냥 받아들이자고 인정하자고, 그렇게 나를 다독이면서.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땐 정말 힘들었어



그때의 아픔들을 나열하던 문장들의 수가 말할 때마다 점차 줄어들 때, 어젯밤 드라마 내용 말하듯 가볍게 말할 때마다 느낀다. ‘나쁜 기억의 독소가 빠져나가고 있구나’, ‘이제야 벗어나고 있구나’하고.


생각해본다. 어쩌면,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나쁜 기억의 방 크기를 줄일 수 있는 건 단순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을 용서할 준비가 된 마음이 아닐까. 마음을 충분히 다잡을 시간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이제 괜찮다고, 용기 내서 뒤돌아설 수 있는 시간. 시간은 단지 내가 그 용기를 낼 수 있게끔 기다려준 것이 아니었을까. ‘다 지난 일이야’하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만이 독소를 제거하는 특효약이 아닐까.






언제까지고

울고 있을 수만은 없다.

툭툭 털고 일어나

끝 모를 구덩이를 조금씩 메워본다.


바닥이 차오르고

보이지 않았던 밑바닥이 보일 때쯤,

비로소 나는 그때 그 시간을 놓아줄 준비가 된 것이다.


내 마음에도 심심한 위로를 건네본다.

괜찮다. 이제 괜찮다.

모두 지난 일이고

돌아보면 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너에게만 닥친 불행은 아니었다고.

그러니 조금만 힘들어 하다

이곳을 빠져나오자고.




@YogurtRa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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