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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작가 Jun 21. 2018

불안, 사랑받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누군가 사랑해달라 울부짖는다면 그 사람이 불안하다는 시그널일지도 모른다.

며칠 전까지도 식기 선반에 놓여 있었던 텀블러.

이 녀석은 마치 붙박이 마냥 자리를 옮길 기미가 없었다. 주인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되어 그대로 굳어버린 쇠덩이처럼. 설거지하기 귀찮던 날, 물 마실 컵이 없던 찰나 그 텀블러가 떠올랐다. (그제야!) 찾아보니 수납장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었다. 언젠가 정리하다가 치운 모양이었다. 이 텀블러를 볼 때면 갚지 못한 돈을 가진 채무자처럼 마음이 뻐근했다. 텀블러는 그가 사준 것이었다.  


그가 뜬금없이 찾아와 선물이라며 들이밀던 물건. 평소 물을 많이 마시지 않는 나를 위해 구입했더랬다. 텀블러는 그의 애정 그 자체였다. ‘나는 늘 너를 생각하고 있었어’라는 뜻이었으니까. 사실 그 상황이 썩 기쁘지만은 않았다. 왜였을까. 내가 원치 않는 사랑의 템포여서 그랬을까?


사랑은 2인 3각 달리기와 같다. 두 사람이 한 호흡으로 같은 곳을 향해 뛰는 행위. 까딱하다가는 넘어지기 십상이다. 한 사람이 너무 빨라서도, 느려서도 안 된다. 난데없이 방향을 틀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는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50미터 달리기를 하듯 빠르게 뛰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마라톤 전문이었기에 걸음을 뗄 때마다 넘어지기 일쑤였다.



내가 너를 이만큼이나 사랑한다고! 

그러니 날 (내가 원하는 만큼) 더 오래 쳐다봐달라고… 



알고 있었다. 그는 나의 사랑에 늘 목말라있다는 걸. 빨리 뛰고 싶어 하는 그가 나의 속도에 성이 찰 리가 없었다. 그는 이따금씩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포옹을 할 때도 갈비뼈가 으스러질 만큼 껴안곤 했다. 어쩌다 전화를 못 받을 때면 부재중 전화를 15통(혹은 그 이상, 받을 때까지!)을 남기기도 했더랬다. 언제부터 그의 애정이 불편해졌을까. 한두 번까진 분명 설렘으로 다가왔는데. 나를 이만큼 사랑한다고, 어디론가 보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그의 비언어적 애정표현. 그것을 깨닫기 전까진 분명 그랬는데…


그는 우리의 사랑을 불안해했다. 그가 가진 불안이 점차 잦아들자 덩달아 나도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왔고 간혹 (며칠 정도만이라도)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기도 했다. 그에게 연인이란, 독립된 인격체로 살던 두 사람이 만나 ‘늘 같이’가 된 사람들이었다. 나는 ‘따로 또 같이’, 특히 ‘따로’의 시간이 중요한 나였기에 사랑의 온도차는 점차 커져만 갔다.  



당신은 언젠가 떠날 사람 같아



벽에 걸린 액자가 덜그럭거린다. 떨어질 듯 불안해 보여 살펴보니 못이 벽에서 반쯤 튀어나온 상태였다. 헐거워진 못에 걸린 탓에 축 처진 액자는 힘아리가 없어 보였다. 그가 이 액자라면 나는 헐거운 못이었을 터. 그가 내게 원했던 건 벽에 제대로 못질을 해달라는 것뿐이었다. 전전긍긍, 지금의 안락함을 잃고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 날까 무서운. 단지 그가 바라는 건 마음이 평온뿐이었다. 그는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했다. 흐릿한 시야 탓에 분주하게 와이퍼를 작동시키는 운전자처럼, 나의 마음을 또렷이 보기를 원했다. 빨라지는 그의 심장 박동수를 따라 그는 자꾸만 작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더욱 나에게 몰입했다. 빨리 나를 안심시켜라! 나를 더 사랑해달라. 나에게 확신을 달라…



뭐가 그렇게 불안해?  

많이 사랑해주는데도 왜 자꾸 확인하는 건데?  

왜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거야? 



질투를 넘어선 집착 >>> 너를 어디에도 빼앗기지 않겠다!

쏟아지는 선물 공세 >>> 내가 이만큼이나 잘해주니 내가 싫어질 틈이 없겠지?

툭하면 나오는 “우리 헤어져” >>> 날 사랑한다면 잡아라 식의 협박.


사랑받기 위한 그의 처절한 몸부림에 나는 조금씩 메말라갔다. 잠시라도 시선을 거두면 나를 부르는 그의 음성에 소름 끼치기도 했다. 자꾸만 조여 오는 압박에 결국 풍선이 터져버렸다.  



나 지금 저 틈에 갇힌 것 같아. 숨 막혀



맞은편에 보이는 음료수 자판기 한 대. 벽에 바싹 붙어 있는 자판기로 인해 벽에는 짙은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벽과 자판기와의 틈은 불과 10센티미터 남짓. 벤치에 앉아 저 어둔 그림자를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동질감이 생겼다. 저기에 누가 갇혀있다면, 또 그게 나라면. 이는 살려달라는 나의 절규였다.  



그를 이해하게 된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가진 불안.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걸. 이는 나에게도 존재한다는 것을. 가까웠던 누군가가 떠나가는 뒷모습에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은 날. 잔상처럼 남아있는 서너 살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침 일찍 부리나케 출근하는 엄마의 정신없는 모습. 설거지하는 엄마의 등. 뒤돌아 누워 보이지 않는 엄마 얼굴. 울고 있는 나를 두고 매정하게 어디론가 가버리는 엄마. 가버렸다. ‘갔다’라는 말로는 미처 표현이 되지 않는, ‘-버렸다’가 더해질 때 그때의 슬픔이 완성된다. 그 시절 나의 그림에는 언제나 엄마 얼굴이 없었다.  


불안의 씨앗은 날 때부터 주어진다. 나도 모르는 새에 심긴 불안의 씨앗은 싹트기도, 그대로 묻혀있기도 한다. 씨앗의 발아 조건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작은 먼지만큼 작은 변화에도 반응하지만, 누군가는 바윗덩어리를 던져야 찔끔 움찔한다.  


불안을 드러내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그는 매달리는 방식을 택했고, 나는 도망치는 걸 택한 것뿐. 우리는 모두 불안이란 상처를 갖고 있었다. 불안을 아물게 하기 위해 안정적이고도 충분한 (넘치는 것 말고) 사랑이 필요하다. 이때 표현하는 사람이 얼마나 표현을 했느냐 하는 절대적인 양은 중요하지 않다. 상대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표현해주는 것.


만족하는 사랑의 기준은 바로 ‘나’다. 내가 원하는 걸 그가 주지 않을 때, 내가 원하는 만큼 돌아오지 않을 때 불안은 시작된다. 결코 상대가 얼마큼 표현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헐겁던 못은 자기 능력껏 액자를 지탱하려 노력했을 뿐. 정작 못은 그 상태가 편안했을 수도 있는 거니까. 비록 액자는 불안에 떨었을지라도 말이다.



버림받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저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사랑할 뿐.

우리가 가진 마음의 크기만큼 사랑할 뿐.


만일, 누군가 사랑해달라 울부짖는다면

그 사람이 불안하다는 시그널을 보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비록 자신이 초라해진대도.

그래서 지치는 순간이 온 대도.


슬프게도

불안한 사람은 힘이 없다.




@YogurtRa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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