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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작가 Jun 07. 2018

손 놓는 순간 없어질 관계들

모든 관계에는 권력이 존재한다. 관계유지를 위해 애쓰는 사람과 아닌 사람


나는 사람 만나는 게 어려워



그녀는 오늘도, 만나자는 나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녀는 누군가와 관계가 깊어지는 걸 두려워했다. 본인이 만들어놓은 삶의 테두리에 누군가를 끌어들이는 것을 무서워했다. 끌어들이는 것뿐이랴. 들어오겠다고 문 앞에 선 사람들도 외면했다. 이때 피해자는 나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방어벽에 어리벙벙하기만 하다.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친밀한 관계라 생각했는데 한순간에 차가워진 상대방의 표정에 당황할 수밖에. 내가 바란 건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만나 서로 사는 이야기를 하고, 고민을 나눈다. 나는 그녀와 그런 시간을 갖고 싶었다.


(내가 아는 바론) 그녀는 외향적인 척하는 내성적인 사람이다. 처음 만난 사람과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다. 대화와 대화 사이, 약간의 틈이라도 보일 때면 웃음으로 그 공간을 채우곤 했다. 그녀에게 대화 속 침묵은 절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었다. 빈 공간이 생길세라 늘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그것이 얼마나 그녀를 피곤하게 했는지 가늠할 수 없지만, 그녀가 누구와도 친밀한 만남을 갖지 않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해진다.


어느 날 그녀에게서 대뜸 문자를 받았다. 그것도 먼저. (1차 놀람)

만남뿐만 아니라 연락조차도 먼저 하지 않는 그녀였기에 나는 무척 놀랐다. 누군가 안 하던 짓을 하면 괜스레 불안해진다. (뭐지? 갑자기 무슨 일이래?)


너에게 편지를 썼어. 주소 좀 알려줄래?



주소라니! (2차 놀람) 또 한 번의 충격. 지금의 연락이 있기 전까지 우리의 마지막 대화는 무려 9개월 전이었다. 긴 호흡을 거치며 그녀가 희미해질 무렵 난데없이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손편지를 보내겠다며, 나의 집주소를 보내달라고. 단어가 갖는 상징성을 중요시하는 나는 ‘손편지’와 ‘주소’에 한동안 시선을 머물렀다. 나를 위해 편지를 쓰는 그녀의 모습. 한 단어, 한 문장 고심한 듯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펜. 그리고 친밀함의 끝인 내가 사는 집의 주소…


약 일주일 뒤, 편지를 받았다. 이 얼마만인가. 우편함에 담긴 손편지라니. 우편함에서 편지를 꺼내며 느낀 바람, 편지봉투의 촉감까지 오롯이 느끼며 편지 겉봉투를 뜯었다. 종이 노트를 투박하게 찢어 쓴 편지. 첫 문장부터 생각이 많아졌다.



꼭 남자만 나랑 다른 사람을 만나라는 법은 없나 보다. 그치.

우리는 하나부터 여덟까진 다르고, 아홉열만 비슷한데.  

그래도 잘 지내니 말이다. 



그래도 잘 지내니 말이다…

그래도 잘 지내니 말이다?

잘 지낸다고 우리가?


이 문장은 그간의 우리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끔 했다. 그녀의 말처럼 우리는 하나부터 여덟까지 다르고 아홉열 정도만 비슷했다. 문제는 그 뒤 문장이다. ‘그래도 잘 지내니 말이다.’ 우리가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걸까? 잘 지낸다는 것의 정의는 뭘까?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건 5년 전, 방송국을 다니던 시절이다. 퇴사 후 따로 만나는 날이 1년 중 손가락 하나가 꼽힐까 말까 할 정도인 그렇고 그런 관계. 그래, 가족들과 다 같이 마주 앉아 밥 먹기도 힘든 시대에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것도 많이 만난다고 봐야 하는 걸까. 그거에 만족해야 하나. 그런데 매번 만나자고 제안하는 쪽이 나라면? 이것도 잘 지낸다고 봐야 하는 건가? 이때 손 내민 사람이 상처를 받지 않았다면 또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이지 괜찮았을까? 편지 중간쯤 이런 글귀도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너에게 왕왕 상처 줬을 거라 미루어 짐작한다. 

늘 불평 없이 이해해 줘서 고맙다. 



무슨 소리! 나는 괜찮지 않았다. 왕왕 상처를 받았었다.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불평 없이 이해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나라도 노력해야만 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던 것뿐이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손을 먼저 내밀지 않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그녀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으니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과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마음이 없는 사람. 누군가는 먼저 손을 내밀어야 했고, 그 몫은 언제나 나였다. 그리고 모든 상처는 늘 손 내민 사람, 내가 떠안았다. 슬프지만 그게 사실이다.



모든 관계에는 권력이 존재한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상처를 주는 누군가가 갑이라면, 받은 사람은 을이 되려나. 이때 갑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상처를 준 사람의 의도가 어떠했건 간에 피해자가 아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다만, 그녀에게 받은 상처가 오래가지 않는 이유는 그녀를 진정 이해하기 때문이다. 사람 만나는 걸 어려워하는 그녀를. 혼자가 아닌, ‘너와 내’가 함께하는 시간들을 거쳐 ‘우리’가 되는 과정을 힘겨워하는 그녀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 진정 이해한 것인지 체념한 것인지도 혼란스럽다. 그냥 이해했다 치자. 굳이 더 들어가 보자면 이 관계를 이해했다는 내 생각은 자기방어다. 그렇게 말해야 상처 난 마음이 조금은 덜 아플 테니...


나는 어떤 이유로 그녀 곁에 있으려고 할까. 그 이유를 찾는다면 아픔 없이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유 있는 만남은 ‘진짜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이 관계는 크게 변하지 않을 테다.

만일 변한다면 그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다.

내가 이 관계를 포기하는 순간, 끝이 난다는 것.


나에게는 수많은 ‘그녀’가 있다. 손 놓는 순간, 없어질 관계들.

점점 힘에 부친다. 가지치기하듯 속아내야 할 것들도 있을 테다.

그녀는 그런 것들 중 하나가 아니라고 믿고 싶다.




@YogurtRa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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