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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작가 Jul 12. 2018

상처가 만든 그들의 왜곡된 세상

그들에게 세상 모든 일은 ‘기-승-전-상처’로 귀결된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 여기는 한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불행을 기준으로 세상 모든 일을 판결했다. 불행의 근간은 외모였다. 그녀는 마주치는 모든 이들을 불안한 눈동자로 힐끔거림으로써 판결을 시작했다.



저렇게 날씬한 여자는 연애 고민 따윈 없겠지?

분명 사랑받기만 할 거야.



그놈의 판결은 좋아하는 남자에게도 해당된다. 어렵사리 성사된 소개팅. 오늘은 두 번째 만남이었다. 남자가 영화 데이트를 요청하자 여자는 (쓸데없는) 의심을 시작한다. 왜 나(같이 뚱뚱한 여자)랑 영화를 보려 할까? 딱히 어딘가 부족해 보이진 않는데… 영화 볼 친구가 없나? 아님 엄청난 하자가 있는 건 아닐까? 이를 테면 집이 초가집이라거나, 남자 구실을 못한다거나 뭐든 간에… 등등.


여자는 남자를 만난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이유를 찾았다. 단서는 예매한 영화 제목에 있었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그럼 그렇지. 여자는 영화티켓을 보며 바로 수긍한다. 가벼운 그녀? 가벼운?? 남자는 자신에게 뚱뚱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확신하면서. 나름 데이트라고 설레며 찾아 입은 원피스. 티켓을 보자마자 울퉁불퉁 삐져나온 살들이 무색해 손으로 몸을 쓸어봤다. 잠시만 다녀온다던 화장실에서 그녀는 왜 나오지 않았을까. 그렇게 영화는 상영을 시작했고 두 사람은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것으로 간만에 찾아온 썸은 끝났다. 남자는 졸지에 여자에게 가벼운 여자를 밝히는 사람이 돼버렸다. 여자는 자기가 뚱뚱해서 차인 것이란 확신을 제외하곤 그날의 소득은 없었다.






어느 사내 심리상담실. 한눈에 전 사무실 전경을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작은 규모의 회사지만 나름 사원들의 정신건강을 챙기는 부서가 있었다. 이곳에서 이유모를 미움받음으로 괴로워하는 남자를 만났다.  



모든 직원들이 날 싫어하는 것 같아요

다짜고짜 억울함을 호소하는 그. 비록 눈동자는 갈피 잃은 듯 분주해 보였지만, 의외로 목소리는 차분했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 느끼게 했느냐고 물으면 그 개개의 이유들은 (내가 보기엔 사소했지만) 그에겐 은행빚만큼이나 무거운 것들이었다. 우선 며칠을 두고 함께 지켜보자며 그를 다독이곤 돌려보냈다.  


사실 그의 발언은 충격이었다. 그는 회사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사원이었다. 이런 사람은 어느 조직에서나 한 명쯤은 있지 않던가. 너무 조용해 그가 출근했는지조차 간혹 잊을 정도의 존재감. 무색무취한 대상으로서 음식으로 치면 어떤 맛도 안 날 것 같은 그런 사람. 그림자처럼 다니는 그는 누구에게 피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존재감도 없는데 무슨 갈등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은 굉장히 거슬린다.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자신을 째려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미움받는다는 건 마음의 부채마냥 하루하루가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날들이다. 탕비실에 남은 마지막 커피믹스. 그가 옆에 선 김대리를 의식하며 잠시 머뭇거린 사이 김대리가 날름 집어간다. 또 말해보자면 이런 거다. 2시간 전에도 비어있던 정수기 물통, 누구도 새로 물통을 갈지 않았다. 그는 지난달에도 자신이 갈았던 것을 기억하며 물통을 힘껏 들어 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들은 날 싫어하는 게 분명해.  

아니고선 나를 이렇게 대할 리가 없어! 



문제는 여기에 있다. 사람들의 모든 행동을 자기가 정한 기준으로 규정짓는 것. 그는 모든 임직원을 잠정적 가해자라고 선고한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자신을 향한 비난이 함의된 것이라 여긴다. 그를 향해 사방 군데에서 날아오는 독침. 그들이 지닌 애초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물어서 대답을 듣는다 해도 소용없는 노릇이다. 그들이 아무리 아니라 증언해도 그는 그들의 말을 쉽사리 믿지 않을 테니까.



그 사람 좀 이상해요.
같이 일하기 불편해요



어느 날부터 그를 불편해하는 민원이 늘었다. 신기한 일이다. 존재감 없던 그가 어느새 사내 중심에 서 있게 된 것이다. 그에 대해 무감하던 사람들과 자신이 만든 법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던 그. 선량한 시민들이 그의 이상하고 기분 나쁜 눈초리를 모를 리 없었고 끝내 원망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직장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두 번째로 상담실을 방문하던 날,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 이야기를 해준 것이 기억났다. 여자가 자기를 바람 맞혔다고. 자신을 만나자마자 얼굴이 사색이 돼서는 영화 상영 시작시간이 지나도록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나 뭐라나. 그 여자도 사실 자기가 싫었는데 그날 억지로 나온 것 같았다고.  


처음 들었을 땐 그 여자가 이상한 여자다 싶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 싶다.


 




언젠가 받은 상처가 곪았다.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한 탓인지. 상처의 크기가 더 커지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주는 영향력은 실로 지대했다. 아팠던 지난날에 대한 집착. 급기야 세상 모든 일의 의도를 왜곡해 해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 그때 그 여자가 날 쳐다보는 이유 >>> 내가 뚱뚱해서 

* 지하철 역무원이 나한테 쏘아붙인 이유 >>> 내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 내가 먼저 종업원을 불렀음에도 다른 테이블에 먼저 가는 이유 >>> 나를 무시해서



대체 누구의 잘못일까.

애초에 상처를 준 가해자 탓일까?

강박증 환자처럼 상처만 쳐다보고 앉아있는 수감자 탓일까?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스스로 판사가 된다. 상처라는 색안경을 끼고 있다. 그들에게 세상 모든 일은 ‘기-승-전-상처’로 귀결된다. 여자 눈엔 세상 모든 일의 결론은 자기가 뚱뚱하기 때문일 테고, 남자 눈엔 모든 일의 이유가 자기를 싫어해서다.  


더 큰 문제는 이거다. 상처에 벗어나지 못하고 되려 집착하게 된 이들은 주변인들을 지쳐 떠나가게 만든다는 것. 어떻게 하면 이들이 이 출구 없는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앞서 짐작해 사람들을 쏘아붙이기보다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질문해야 할까?

이것만이 최선임을 알지만 ‘질문’에는 많은 용기가 요구된다.  


자신이 생각한 바대로 대답이 돌아올까 봐, 그걸 기어코 자기 두 귀로 들어서 확인 사살하는 꼴이 될까 겁이 나기 때문은 아닐까. 결국은 자기방어다.


한 번 상처받아 왜곡돼버린 세상은 상처에 취약하다.

또 다른 상처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무모한 용기는 거절된다.

왜곡된 시선은 반복된다.


그리고 상처받은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점차 좁아진다.

대체 누구의 잘못일까?




@YogurtRa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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