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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Oct 16. 2024

가을비

살아가는 이야기





코막힘이 심해서 눈을 뜨니 새벽 3시 54분이었다. 조금 더 자고 싶어서 다시 누우려고 하다가 (에그, 얼마나 더 잔다고…) 하고 일어나 앉았다. 어제 병원에서 받아온 스프레이를 투입했다. 그래도 여전히 막힌 코를 킁킁 거리며 창 밖을 보았다. 길이 젖은 것 같다. 베란다로 나가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조용히 비가 내리고 있다니, 최근에 이렇게 조용히 내린 적이 있었나 싶다.


비의 종류도 여러 가지다.

어느 날은 온갖 아우성을 치며 내릴 때가 있다. 창문을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정신없이 두드리며 창문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엄청난 비바람을 몰고 오는, 얼마 전 태풍이 북상할 때가 그랬다. 그날은 집안이 지금이라도 날아갈 것 같아서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 집은 무사했지만, 피해를 받은 지역은 참혹했다. 산사태가 일어나 집이 무너지기도 하고 떠내려 가기도 했다. 그런 날은 자연의 위력 앞에 힘이 빠져 맥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다.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자연 앞에 인간은 그저 무력하다.


어떤 날은 새색시처럼 살살 내리다가 갑자기 엄청난 소나기로 바뀌기도 한다. 아침에, 그것도 마침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시간에 정신없이 퍼부어댈 때는 정말 하늘을 향해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 애들이 학교 갈 때는  아시죠? 조금만 뿌려 주세요)라고.


또, 어떤  날은 비가 오는지 알 수도 없을 만큼, 안경에 달라붙는 빗방울로 비가 오는구나 느낄 만큼 살짝살짝 올 때도 있다. 언젠가 늦은 귀가 시간,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올려다본 하늘에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떨어지던 빗발은 마치 바늘땀처럼 촘촘히 조용히 내려서, 안경에 빗발이 하나씩 촘촘히 내려앉아 걸어가는 시야가 점점 흐려지기에 안경을 벗고 걸어간 적이 있었다. 우산은 필요 없지만 안경이 좀 곤란한 그런 비도 있다.


오늘 내리는 비는, 뭐랄까 중후한 신사의 말소리 같기도 하고 점잖은 부인의 말소리, 아니면 사랑하는 연인들이 둘만의 시간을 즐기며 말없이 손 잡고 조용히 천천히 걸어가는 것처럼 소리도 없이 조용히 내리고 있다. 빗소리를 듣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너무나 조용히 내리는 비도 참 매력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제, 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오후 5시.  학교에서 가까운 이비인후과 접수 마감 시간은 오후 5시 반이다. 수업을 마치고 애들을 돌려보내고는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10분.  서둘러 찾아갔다. 내가 마지막 환자였는지 병원은 조용했고 마감 준비를 하는 눈치였다. 마감 전에 접수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앉아서 기다렸다. 이름이 불려져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퇴근 시간을 앞둔 의사 선생님은  피곤하고 만사가 귀찮은 표정이었다. 조금 불안한 마음. 그래도 나는 나의 증상을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자꾸만 나의 말을 자른다.


 “그러니까, 코막힘이 심하고... 입으로 호흡을 해서...  에에 또... 목에 염증이 생겼네요”


“???”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직 증상을 다 말하지도  못했는데 통상적인 증상을 늘어놓고 내 말은 싹둑 잘라버린다.


“약 처방해 드릴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진료는 끝났다. 나는 멍하게 앉아서 흰 가운을 펄럭이며 나가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받아온 약이라 그런지 왠지 신뢰가 가지는  않았지만, 아쉬운 놈이 뭐 한다고  약을  었으나  자기 전에는  코막힘이 심해서 스프레이를 투입하고 잤다. 그런데도 코막힘으로 괴로워서 잠을 깼으니 전날의 불쾌감이 이어지며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환자의 이야기도 제대로 듣지 않는 의사 선생을 생각하면 불쾌했지만 스프레이를 투입하 후였다. 조용히, 정말 조용히 내리는 비, 빗발자국도 들리지 않는 비가 신기하여 한참을 베란다에 서 있었다. 비에 정화된 탓일까. 불쾌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마음이 몽글몽글 해진다.  자연이 주는 힘이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비구름으로 아침해가 보이지는 않지만 어스름 밝아오기 시작하는 하늘.

새벽 동안 내리던 비가 이제는 그친 것 같다.  새들이 시원하게 원을 그리며  하늘을 날고 있다. 여기저기 집집마다  하나 둘, 불이 켜지기 시작하고 바이크가 달리는 소리, 저쪽 도로에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 새벽이 움직이고 있다. 달그락거리며 옆집 할머니도 일어나신 것 같고 또박또박 구둣발 소리도 들려온다. 하루가 이렇게 조용히 시작되고 있다.


오늘은 가을비가 참으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이비가 그치면 점점 추워질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차가워지기는 하지만 옷 하나 더 껴 입고 길을 나서면 기분 좋게 스치는 바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고 높아지는 가을 하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설레인다.


가을이 참 좋다.


         2015년 10월









추신: 일본에 있을 때는 늘 기침에 비염에 감기에 시달렸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은 건강이 꽤 좋아졌다. 생각건대 비염 스프레이는 사용을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지나고 나서 느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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