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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Oct 28. 2024

한국어 할머니

살아가는 이야기






한국어 공부하러 오시는 분들 중에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나는 그분을 한국어 할머니라고 불렀다. 물론, 할머니 앞에서 부르는 것은 아니고 나의 기록물에서 사용하는 애칭이다.


고운 백발이 잘 어울리는 귀엽고 소녀 같은 분이시 다. 할머니가 한국어 공부를 하게 된 동기와 소원이 있는데, 첫째로는, 나이가 더 들기 전에 한국에 가보고 싶은 것, 둘째로는, 한국에 가서 부여의 옛터를 찾아보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를 만났을 때는 간단한 문장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열정이 대단하신 분이시다. 나는 따라가기도 힘들다.


처음 만났을 때, 조그마한 수첩에(내가 중, 고등학교 때 단어를 적고 들고 다니며 외우던 그런 작은 단어장 같은 수첩이다) 그야말로 깨알 같은 글씨로 한국어 일기를 오셨다. 한번 봐 달라고 하여 나는 읽고 첨삭을 해주었다. 그 후로 수업이 끝나면 항상 남아서 쓰고 온 내용을 첨삭을 받아서 가셨다. 나는 그저 할머니가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고 그래서 일기를 쓰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하토코 씨에게…"


일기가 편지로 바뀌었다.


"하토코 씨가 누구예요?"

"아는 동생이에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동안 첨삭해 주었던 일기는 알고 지내는 동생인 하토코 씨를 위한 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토코 씨 역시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었다고 했다. 그런데 몸이 안 좋아서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멀어서 병문안을 갈 수는 없었지만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물을 때면, 한국어공부를 계속하는 것을 늘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일기를 쓰기로 마음을 먹고, 내가 첨삭을 해주면 그것을 예쁜 편지지에 옮겨 적어서 하토코 씨에게 보내주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적잖게 놀랐다.


할머니는 아침에 지역신문을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계셨는데, 나는 할머니가 돈이 필요하거나 아니면 운동삼아 하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하토코 씨 이야기를 하다 보니 지역신문을 돌리는 것도 하토코 씨에게 편지를 보낼 때, 편지만 보내기가 섭섭해서 무엇인가 마음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하다 지역신문을 돌리게 됐다는 것도 듣게 되었다.


연금 생활을 하고 있는데 연금으로는, 사치를  부리거나, 누군가에게 무엇을 꾸준히 사서 보낼 만큼의 여유는 없다고 했다. 편지를 보내면서 과자나  과일이라도 보내고 싶어서 주 2. 3 회 정도 지역신문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말이 아르바이트지, 지역신문을 돌리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회사의 소개에는,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 운동 삼아 누구나 가볍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되어 있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면 책임이 따라오게 되고, 날씨가 좋으나 나쁘나, 비가 오는 날이나 한여름 더운 날에도 날에도 약속한 날에는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돌아보는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 평소 공부할 때도 그 열정에 늘 탄복하고 있던 나는 더욱 감동을 받았다.


그 해 겨울, 나는 할머니를 위해 숄을 하나 짰다.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모양의 숄이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실을 사용하여 느낌이 아주 좋은 숄이 완성되었다. 막상 할머니에게만 드리려니 다른 분들이 생각나서,  함께 공부하는 분들에게도 간단히 머플러를 짰다. 요즘은 머플러 하나도 너무나 싸게 살 수 있는 시대이다. 싸고 좋은 머플러가 많겠지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할머니는 무척 감동을 하며 나의 그 선물을 받아주셨다. 물론 같이 공부하시는 분들도 작은 머플러 하나지만 감동하며 받아주셨다. 행복해하시는 모습에 내 마음도 행복한 한 때였다.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마운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바쁜 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은 있지만, 결국 도전을 못하고 생각만으로 끝날 때가 많이 있다. 할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며 나도 시간을 내어 도전해 볼 용기를 얻은 것이라 할머니께 많이 감사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한국어를 10년 이상 가르친다고 해도 서로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일본 특유의 다테마에(겉모습)와 혼네(속 마음)가 있기 때문이다. 만나서 즐겁게 공부를 하지만 교실을 나가면 그것으로 서로의 관계는 끝나는 것이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강사료를 받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에 불과할 뿐이다. 10년 이상 한국어를 가르치며 깨달은 것은 일본인의 교제 안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걸 인정할 때에 부담 없이 교제할 수 있다. 그래도 한국인인 나의 입장에서 보면 뭔가 조금 부족한 만남이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후로 나는 몇 명의 그들과 조금 더 가까워진 관계를 느낄 수 있었다.


한국어 할머니는 한국의 동요를 좋아하신다.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적이 있다며, 고향의 봄은 곧잘 흥얼거리신다. 언젠가는, ‘깊은 산속 옹달샘’ 노래를 번역을 해서 가지고 오신 적도 있었다. 같이 공부하는 분이 들고 온 누르면 동요가 흘러나오는 책을 보고는 그런 책도 있냐며 당장이라도 한국에 가서 사고 싶다고 눈을 반짝이셨다. 한국은 지금이라도 가고 싶지만, 거동이 불편하신 할아버지가 계셔서 당장은 힘들다고 하셨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런 할머니 모습이 생각나서 아이들이 듣는 동요 듣기 책을 하나 사다 드렸다.

어린아이들의 장난감 같은 책이지만, 그것도 아주 훌륭한 한국어 교재가 된다. 그 책을 드리자 할머니 눈에서는 하트가 뿅뿅 터져 나왔다. 너무너무 행복하다고 하시며 노래를 안 보고 부를 수 있을 때까지 들으며 연습하겠다고 하셨다.

행복해하시는 모습에 나 역시 행복했다.


한국의 옛날이야기를 공부할 때는, 한 문단씩 내용을 번역을 해서 오라고 했다. 우선 나와 함께 한국어로 동화책을 읽고, 다음에는 자신에게  할당된 문단을 스스로 다시 한 번씩 읽으며 번역한 내용을 발표했다. 하나의 문장에도 사람에 따라서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다. 그분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하지만 결국은 내가 가장 공부가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르신들에게 나는 한국어를 가르치지만, 한국어 이상의 것을 배우게 된다. 인생을 배우고, 잊혀지는 일본의 옛 모습을 배우게 된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들, 료를 찾으려면 한참 찾아야 할 이야기들을, 나는 어르신들께 듣는다. 간혹, 일본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사전을 찾기 전에 일부러 물어보기도 한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작은 뉘앙스의  말들을 나는 배우게 된다.


무엇보다, 그분들의 열정은 식을 틈이 없었다. 할머니와 공부하는 날이면,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초콜릿을 가방에 넣고 갔다. 할머니는 초콜릿을 아주 좋아하셨다. 할머니는 더운 여름날에도 추운 겨울에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달려오셨다. 여름에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땀을 닦으며 오셨는데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그 얼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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