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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Sep 15. 2023

멍 때리기의 본고장, 교토

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_여행


나의 첫 일본 여행은 친구 P와 함께 했던 교토-오사카 3박 4일 일정으로, 교토에서 2박 후 오사카에서 1박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생각보다 좋았던 교토에서 3일 같은 2일을 머물렀기에 오사카는 돈키호테정도에서 마무리되었다.


​교토에 머무는 이틀 동안 아침잠이 많은 친구를 두고 이른 새벽 아무도 없는 거리를 마음껏 쏘다니며 필름 카메라에 거리를 담고 호텔로 돌아와 제때 밥만 먹어주면 킹콩이 되지 않는 순한 P와 조식을 먹으러 갔다. 정갈하고, 때론 짜고 싱거운 것들로 배를 든든히 채운 후 길을 나서면 시간의 무게를 단단히 입은 듯 오래된 거리의 풍경이 우릴 맞이했다. 우리는 '교토가 처음'이라면 이란 단어로 시작해 추천 글에 올라온 물을 사용하지 않고 돌과 모래로 산수를 표현한 '가레산스이' 정원과 한 편에 마련해 둔 이끼 정원을 둘러봤고, 번화가에서는 한국에도 있는 무인양품이나 예쁘기로 소문난 것들을 판다는 로프트 숍에 들러 편지지나 예쁜 펜을 사서 낭만까지 챙기고 돌아왔다. 식료품 마니아인 P와 나는 교토의 부엌이라 불리는 니시키 시장만은 포기할 수 없었고 대단한 발견은 없었지만, 시장이 주는 생동감만으로 우리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알았다. 그 시장에서 난생처음 하얀 딸기라는 걸 먹고, 흥정도 없이 귀여운 칠부 셔츠를 사고, 무맛 두부 음료와 도넛을 먹었다. 카모강을 코앞에 둔 스타벅스 산조점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하루를 마감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편의점에 들러 산토리 맥주와 주전부리 몇 가지를 사 들고 돌아와 피곤을 주무르며, 교토가 참 매력 있다고 후기를 나누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때 우리가 보았던 교토는 오래된 것, 쉽게 버릴 수 없는 풍경 사이로 안온한 빛의 그림자를 간직한 채였다.



이치조지, 엔코지



​나는 그 매력에 취해 일 년에 두세 번 일주일 이상 머물다 오곤 했는데, 그사이 좋아하는 동네와 길이 많아진 탓에 철학의 길을 비롯하여 카모강을 끝도 없이 걷거나, 아라시야마, 이치조지의 케이분샤 책방부터 엔코지 사찰과 우지, 오하라까지 속속들이 종종걸음으로 빡빡하고도 느슨한 일정을 소화해 냈다. 대식가의 면모를 뽐내며 도장 깨기 하듯 해치운 초밥, 라멘과 함께 마셨던 나마비루, 세븐일레븐 타마고 샌드위치, 길거리의 당고와 크고 작은 슈퍼마켓까지 어느 것 하나 맘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던 교토의 곳곳이 더없이 좋았다.


그렇지만 내 발끝을 오래도록 붙잡은 것은 한갓진 골목을 걸을 때, 자투리 공간 하나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집집이 만들어 둔 작은 화단들이었다. 나는 그런 것이 우리 집에도, 내가 바라보는 동네 풍경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아기자기한 순간이 좋아 다음 목적지도 잊은 채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식물의 이름을 찾아보기도 했었다. 또 하나는 의식처럼, 때론 할당량이라도 있는 듯 1일 1 사찰 찾아 삼만 리, 사찰 마니아의 행보를 이어간 것인데 굽이진 길을 구글 지도 하나에 의지해 걷고 또 걸어 대면한 고즈넉에 심취하여 가능한 한 오래 가장 먼 곳부터 가까운 곳까지 바라보았다.



오하라, 호센인



멍 때리기 중간중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아무리 복잡한 생각을 했다고 한들 그 끝의 말미는 '좋다'로 마침표를 찍곤 했다. 마음 맑음으로 만들었던 순간들이 내 발길을 자꾸만 교토로 교토의 작은 골목들로, 사색의 공간인 사찰로 이끌었을 것이다. 언젠가 엑셀 시트에 정리된 나의 여행 계획을 보던 동료가 극기 훈련 프로그램도 이렇게는 안 할 것 같다며 어디서도 '쉼'이란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고 아연실색했는데, 분주히 움직여 하루를 알뜰히 쓰며 곳곳에 심어둔 사찰을 사찰로만 읽었기 때문이었을 것임으로 모른 척 웃어넘겼다. 그때 혼자서도 부지런히 모았던 낭만들은 주인을 찾지 못한 채 내 삶 곳곳에 머물러 있고, 코로나라는 긴 터널을 건너 구글에 저장해 둔 좋아하는 곳들의 '폐업함'이란 빨간 글씨 앞에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언젠가 다시 찾을 교토와 그 공간에 또 다른 이름의 새로운 것들이 들어차 있겠지만, 마음 한편이 그리움으로 물드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추억을 간직한 나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우지, 우지바시



​언제가 오래도록 교토에 머물다 오고 싶다. 진한 아쉬움을 달래며 변한 것과 변치 않은 것 사이에서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게 될 것들의 이음새를 새로이 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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