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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Sep 16. 2023

제목을 정하지 못한 글

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_가족


엄마의 꿈은 마당 있는 너른 집에서 사는 것이었다. 내가 중학생이 된 어느 날, 엄마가 꾼 꿈에는 크기가 큰 하얀 구렁이 한 마리가 엄마를 감싸 안았다고 했다. 엄마는 그때 그 꿈이 마치 그 집을 얻기 위한 집몽이었던듯 두고두고 이야기했다. 그 집은 엄마가 장사를 이어가며 모아 온 돈과 직장 생활을 시작한 큰언니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다. 집수리에 대한 부분은 온전히 아빠가 맡았는데, 아는 사람 소개로 받은 업자가 공사 대금만 들고 사라진 바람에 우여곡절이 많았었다. 좋은 마당은 아니었지만 뒷마당 귀퉁이를 어떻게 한 건지, 전에 없던 마름모꼴 작은 텃밭이 자리하고 있었다. 엄마는 그 밭에 고추 모종과 가지, 상추를 조금씩 나눠 심었고 나는 그맘때 짝사랑 중인 옆집 오빠와의 사랑을 이뤄주십사 손톱에 물을 들이기 위해 봉숭아를 심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니 그 집은 엄마 인생 최초의 마당 있는 집이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일터로 나갔던 아빠가 장애 판정을 받던 날, 엄마는 엄마를 포함한 네 식구의 가장이 되어야 했다. 와중에 생겨버린 아이 둘을 어쩌지 못해 종단엔 여섯 식구의 가장이 됐다. 해보지 않은 장사가 없고, 몸 쓰는 고된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던 엄마는 곤궁한 자신의 처지가 눈물겨워 혼자 울다 들킨 적은 있었지만, 자신이 처한 척박한 환경을 버리지 않고, 우리 곁에 남았던 누구보다 강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리어카 행상에서 포장마차로 남의 집 살이에서 작은 식당이 딸린 자신의 집을 갖기까지 엄마는 억척스럽게 살았다. 그 집 한 편에 마련된 작은 식당이 엄마에게는 지난 세월의 가장 큰 위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집에서 엄마와 아빠는 함께 곱창을 손질했고, 엄마는 '삐삐 곱창' 가게를 열었다. 주식처럼 먹는 음식도, 유동인구가 많은 목 좋은 자리도 아닌 길가에 있던 작은 가게일 뿐이었지만 솜씨가 좋았던 엄마의 곱창은 언제나 인기가 좋았다. 나는 그 집다운 집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행복의 가장자리가 아닌, 어느 귀퉁이를 맴돌던 시기였지만 소중한 것이 드물었던 때라, 그마저도 애틋했다.


열심히 살아보려 했지만 거듭되는 좌절이 무릎을 꺾을 때마다 툭툭 털고 일어났던 엄마는 때때로 술에 취해 자신과 자식들에게 손찌검을 해대던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쓸고 닦고 보듬어 왔던 그 집에서 하루도 못 살겠다며 울었다. 몰래 숨어서만 울던 엄마가 자식들 앞에서 목놓아 울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가까이에 엄마를 모셔오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그 집을 팔고 정착한 도시에서 시작한 장사는 자리를 잡지 못했고, 월세조차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엄마의 마음에는 외로움 마저 쌓이고 있었다. 각자 생활에 바빠, 곁에 있을 뿐 멀리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던 때, 엄마가 ‘자식’이라는 빈 품의 도시생활을 접고 다시금 우리가 살던 지방으로 이사 왔을 때는 엄마가 가졌던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상태였다. 엄마는 그때부터 마치 이전의 삶은 없었던 듯 방과 작은 가게가 딸린 집에서 국수 장사를 시작했다. 그때 엄마 나이 쉰둘이었다. 어느 날, 국숫집에 공무원 하나가 찾아와 서류를 내밀었고 그 안에는 아빠가 누군가의 연대보증을 섰다는 문서가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 일이 있고 오 년쯤 지났을 때 처음 알게 되었다. 엄마는 혹여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봐 얼마간 갚아나가다가 나중에는 동네 사람의 도움으로 법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회상하듯 이야기했다. 엄마의 무던한 말과 엄마가 남몰래 흘렸던 눈물, 엄마의 형편없는 상황이 차라리 눈을 감고 외면하고 싶을 만큼 지독하게 느껴졌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소름 끼칠 정도로 싫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취직해 번 돈으로 들어간 짧은 대학 생활을 마치고, 자다가도 바퀴벌레가 천장에서 뚝뚝 떨어져 몸서리치던 성수동 옥탑에 살 때였다. 수습이라는 이유로 당시 최저임금만큼도 계산해 주지 않던 노동착취의 시대를 살았으니, 우리는 누구도 누구의 어깨를 빌릴 수 없었다.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 시키는 것도, 앉은자리에서 그려내야 했던 그림의 가치와 다르게 나의 가치는 그 회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것도 회사라고 품었던 꿈이라고 그만둘 때는 나도 언젠가의 엄마처럼 엉엉 울었다. 지금의 회사를 면접 보기 전 육 개월 정도를 아침에는 편의점, 밤에는 치킨집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빈곤한 중에도 엄마에게 얼마의 용돈 정도는 줄 수 있는 있어 좋았다. 그 돈이 좋아서, 나의 쓸모를 인정받는 것 같아 또 울었다. 엄마도 나도 깊고, 짙은 터널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던 때였다.


나는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아는 좋은 회사에 다니게 되었고, 엄마에게 용돈을 두둑이 챙겨줄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세 들어 살던 국숫집을 나와 방 두 개 거실 하나 있던 전셋집으로 들어갔고 그때부터 남의 주방에서 일했다. 새벽같이 출근해 이른 저녁까지 허리가 휘도록 설거지와 뽀얀 설렁탕을 끓였다. 좀체 식지 않는 뚝배기에 팔을 데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점점 가늘어지는 다리에는 형편없는 뜸 자국이 늘었다. 파스에 냄새가 없었다면, 그것은 영락없이 엄마의 피부로 불렸을 것이었다. 식당 일이 너무 힘들어 잠깐 쉴 때는 그마저도 쉬지 못하고 동네에 오일장이 서던 날이면 묵밥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몸이 상하도록 일한 엄마는 엄마가 일해 모은 돈으로 얼마 전 다세대 주택 하나를 샀다. 비록 마당도 거실도 이전에 살았던 집들에 비하면 아주 작지만 엄마는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그 일을 해냈다. 그동안 내가 줬던 돈마저 쓰지 않고 온전히 예금으로 묶어 두었다. 나는 엄마가 무엇을 위해 누릴 수 있을만한 행복조차 발치에 두고 아등바등 사는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 날이 많았지만, 이제 나는 엄마를 이해하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저 사랑만 하기에도 충분치 않은 시간이니, 그저 잘했다. 칭찬하기로 했다.


어릴 적 배움의 문턱을 막은 외할머니를 일평생 미워했던 엄마는 망팔의 나이에 큰언니가 신청해 준 학습지 교사를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 글을 배우고 있다. 공부만 하려 들면 졸려서, 선생님이 오는 게 가끔은 싫다고 했고, 공부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자식들 이름을 한 자 한 자 예쁘게 쓸 땐 처연하리만큼 둥근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희끗한 머리, 주름진 손, 작은 어깨, 나는 엄마의 그 웃음을 오래 지켜주고 싶다. 그 어려운 시절 엄마가 나를 버리지 않아 내가 엄마 덕에 잘 살고 있어. 고마웠다고. 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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