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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Sep 21. 2023

자비 없는 남자와의 승부 내기

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_S


새로 산 크롭 티를 입은 그날은 S와 스쿼시 대결전이 있는 날이었다. 날아오는 탁구공 하나에도 몸을 사리고 보는 내 인생에 스쿼시란 요물이 나타났고, 없는 재능이지만 탑을 쌓는 마음으로 방어력과 순발력을 익히며 AI 같은 친구에게 특훈도 꾸준히 받아왔으니 '나는 이제 새롭게 태어났어. 이전의 나는 잊어!' 하며 자신만만하고, 용감무쌍하게 그와 내기를 하기로 했다. 단 한 번도 스쿼시를 해본 적이 없는 그였지만 기본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힘의 차이, 공이 낙하하는 위치와 거리감을 캐치하는 능력은 남자인 그에게 유리한 상황인 데다, 주말 야구와 주중 골프까지 하는 그를 이길 확률은 낮아 보였지만 요기베라도 말하지 않았던가.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도 어차피 우리는 승부를 내야 하는 운명이었고 말이다.


​내가 스쿼시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때로는 살짝, 어떤 날은 박박 신경을 긁으며 "너는 나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왜 저래? 생각함) "나는 운동인이야." (누가 아니래? 흥!) "울고불고해도 안 봐줘." (식식 울긋불긋 점점 달아오르는 내 마음) 분명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정신 차리고 보면 "누가 이기나 보자!"로 대화가 마무리되는 식이었다. 불필요한 실랑이가 늘어갔다. (대체 왜? 왜지?)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게임비, 음료수, 밥 그리고 자존심을 건 승부 일정을 잡았다. 스쿼시 단식경기는 11점 5게임 3선 승제 또는 3게임 2선 승제로 이뤄지지만 우리는 세트당 21점, 3세트 진행하기로 했고 승부는 1:1이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2:1이 되어 나는 그에게 패했다. 그는 예상했던 것처럼 공을 정말 더럽게 잘 쳤다. 더럽게라는 말은 잘했다는 말도 있지만, 내가 치기 어려운 얍삽한 공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니 스쿼시를 처음 하는데 왜 잘해?)


게다가 전날 과음으로 고생한 그는 경기가 있던 당일 우리의 컨디션을 수평으로 만들겠다며 종일 나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스쿼시까지 이기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다행이라면 왕년 도루왕, 자타 공인 운동인보다 월등히 체력이 좋았던 나는 (웬만큼 뛰어선 숨이 차지 않는 않는 나야 나) 다른 면에서 그를 놀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구멍 난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경기 내내 이어진 티키타카는 말로는 서로의 멱살을 수백 번은 잡았다 놓기를 반복했지만. 생각보다 격한 스쿼시에 기력이 쇠한 그는 그간 다툼이 무색하게, 한쪽 눈이 충혈된 채. 반쯤 감은 눈으로 밥을 먹었고. 우리는 실로 오래간만에 찾아온 평화로운 저녁과 일상적인 이야기가 오고 가는 이례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기력을 되찾은 그는 또다시 그때 이야기를 꺼냈다. (나 몰래 보약이라도 먹는 걸까?) 하여튼 자비 없기로는 세상 제일이다.



​"내가 그때 말이야. 발목이 꺾여서, 가볍게 이길 수 있었는데"

"나는 그날 새로 산 크롭 티를 입는 바람에 진 거야." (당최, 팔을 올릴 수가 있어야지!)


"너 말이야 내가 스쿼시 처음인 거 알면서 힘 조절 못한다고 그렇게 구박하고 말이야."

"일부러 그런 것도 있었잖아! 이기려고."(유튜브에서 이기는 방법 찾아볼 때부터 알아봤다 내가!)


“너는 공으로 두 번이나 날 맞혔잖아.”

“그건 실수였어. 사과도 했는데 이런다고?”


“실수라면서 정말 좋아했잖아.”

“음... 정말 좋았지 그때.”(다시 생각해 봐도 좋아)

"그런데 너 순발력 정말 없더라."

"그건 인정해."


"빠른 인정 좋아!"

"그런데 말이야 그 체력 어쩔 거야? 나 진짜 크게 실망했어. 순발력이 다 무슨 소용이야?"


"아니 원래는 순발력도 체력도 좋았다고!!"

"그래그래 그런 걸로 하자. 그러니까 이제 그 얘긴 그만해!!


"있잖아. 너는 다음에 더 짧은 크롭 티를 입고 와. 나는 슬리퍼를 신고 갈게. 그럼 할 얘기가 더 많아지겠다 그치?"

"하. 그래. 졌다, 졌어."

자비 없는 남자와의 승부 내기란. 두 눈 감고 하는 윙크처럼 어정쩡한 못난이가 되는 일 같다. B급 정서가 묻어나는 코미디 같기도 하고, 왜 그러는지 모르고 일어나는 급발진 같기도 하다. 타협할 수 없는 티키타카 앞에서 '대책 없이 도발하고, 욱해서 다투다, 묘하게 다정'해지는 미로 같은 관계. 힘만 생기면 '대도욱다묘다'에 쓰느라 여간해선 정이 안 들기도 힘든 요절복통 우리 사이. 다음에는 또 무엇을 하게 될까? 기대되는 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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