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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Aug 21. 2023

다음으로 가기 위한 글

글을 위한 필사 <다음으로 가는 마음, 박지완>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되도록 정확하게) 알고 싶었는데, 눈부신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정도는 다행히 제법 빨리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뭔가 (대단한걸)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에게 없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존재만으로도 나를 주눅 들게 했다. 그들에게 욕망 같은 건 없어 보였다. 재능을 닮기는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욕망하지 않는 모습 정도는 따라 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인생 처음으로 정말 좋아하는 것이 생겼는데, 내가 자격이 있었으면, 내가 눈치채지 못한 나의 재능을 누군가 발견해 줬으면 하고 바랐다. 그렇지만 재능이 모자라는 것도 서러운데 그걸 알지도 못하는 바보는 아니었으면 싶기도 했다. 재능이 있다는 증거를 찾아 헤맸지만 동시에 내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들킬까 바삐 돌아다녔다. 어쩌다 나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이 있었지만, 나의 허세가 안타까운 사람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내가 어린 여자애였기 때문이었다. '재능'이란 걸 오해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해보면 될 것을, 나에게 그게 없으면 어쩌나 하며 벌벌 떨기만 하는 겁쟁이였다. '내가 원하는 재능이 나에게 있는가'가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싶다. 설령 재능이 없다는 얘기를 들어도 그냥 했을 거면서. 어린 나여, 그 시간에 뭐든 그냥 했으면 좋았을 것을.


박지완 <다음으로 가는 마음 _욕망이라는 이름의 친구>




언젠가 유가 내게 말했다. "박완서 작가는 나이 마흔에 소설가가 됐고, 그전까지는 책을 많이 읽었데. 너도 그렇게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어렸을 때부터 서점을 좋아해 틈만 나면 들락거렸고, 용돈이 생기면 시집을 샀다. 나는 서점을 좋아하고(정확히 말하자면 책 냄새를 좋아하고) 시집을 샀던 보기 드문 학생이었으나, 어떤 시도 외우지 않은 어른이 되었다. 커서는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샀는데 행여 모서리라도 구겨질까 고이 모셔놨다. 책을 읽는 기쁨보다, 소장하는 기쁨을 누리며 살았다. 읽다 만 책은 또 얼마나 많고, 그 많은 책을 감당하지 못해 몇 번을 정리해 놓고도 책이라는 이유로 죄책감마저 덜고 소비만 한 셈이다. 그런 내가? 그러니 유의 말은 가당찮았다. 나 같은 적독가가 다독가처럼 글을 쓸 재간도 없거니와 나조차 내 글에 조금의 호감도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유의 말 이전에도, 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썼다. 때로는 뜻을 알 수 없는 글을, 시 같지도 않은 시를, 처음과 끝이 다른 문장을, 뾰족한 마음을, 때로는 글보다 그럴듯한 사진 뒤에 숨어 글을 포장하려 들었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었지만, 나에게 없는 문장을 구해내는 사람들 앞에서 자주 기가 꺾였다. 한탄같은 부러움이 숨에 묻어났다. 누군가의 문장에 기대어 웃고, 울다가도 정신이 들면 마지막은 나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졌다.

밤이면 밤마다 빈 노트북 화면만 째려보다가 겨우 몇 줄을 써놓고, 반복된 퇴고로 지친 어느 아침 S가 물었다. "요즘 어떤 글이 좋아?" 참으로 그 답지 않은 질문이라 생각했으나, 그때 나는 별 고민 없이 "글이란 게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흔들기도 하지만, 어떤 글은 문장 한 줄만으로 마음에 닿아서, 이제는 잘 모르겠어."라고 답했고. S도 왠지 알 것 같다는 짠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는데. 집으로 돌아와 역시나 노트북 빈 화면만 노려보다가 내가 한 말들의 꼬리를 따라가다 보니 S의 알 것 같단 눈빛도 떠올랐고 그때 내게 해줄 말도 생각났다.


​'전체를 끌어안으려 버둥대지 말고, 글의 일부만이라도 구해내자고. 구하다 보면, 전부를 구하는 글 몇 편쯤은 언젠가 완성할 수 있지 않겠냐고'


​박지완 감독이 쓴 것처럼 <<설령 재능이 없다는 얘기를 들어도 그냥 했을 거면서>> 나 역시 누가 뭐래도 계속 썼을 거면서, 너무 욕심부리고 있었던 게 아닌지, 나는 이제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자격을 쌓아나가고 싶다. 다음으로 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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