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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Aug 22. 2023

L,

글을 위한 필사 <열다섯 번의 밤, 신유진>

내가 좋아하는 밤에는 늦은 가을과 커피믹스, 박완서의 나목 그리고 네가 있었다. 나는 다정한 라디오나 슬픈 멜로디 한 소절 들리지 않는 침묵의 밤을 좋아했다. 커피를 홀짝이는 소리, 크래커가 부서지는 소리, 책장의 바스락 거림, 연필이 편지지를 사각사각 밟는 소리면 충분했다. 반도 채우지 못한 편지지는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손이 아파서였다. 나는 손아귀의 힘을 빼고 부드럽게 연필을 쥐는 법을 몰랐다. 온 힘을 다해 검지와 중지 사이를 조여 연필을 잡았고, 그래서 나의 검지와 중지는 지금도 모양이 뒤틀렸다. 검지는 바깥쪽으로 휘어지고, 중지에는 볼록한 혹 같은 게 생겼다. 너의 앞에서 검지와 중지를 숨겼던 것을 모르고, 편지를 내미는 내 손이 너는 예쁘다고 말했다. 이제는 부러진 손톱과 피부에 생긴 얼룩, 두꺼워진 마디 탓에 숨길 수 없는 미운 손이되었다. 네가 봤다면 나를 안타까워할지 세월을 안타까워할지 모르겠다. 엄마는 박경리의 소설을 좋아했지만 나는 박완서의 소설을 좋아했다. 박완서의 문장에는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녀가 살았다. 한밤중 커피포트 물 끓는 소리와 에이스 크래커만으로도 하나의 견고한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사춘기 소녀, 사라진 싱아를 찾아 들판을 헤매는 유년기의 소녀, 노란 집에 텃밭을 짓고 사는 웃음이 수줍은 노년의 소녀가 있었다. 박완서의 책을 읽으면 나는 박완서가 되어 노란 집에 살았다. 밤에는 커피를 끓이고 에이스 크래커를 먹었고, 싱아를 찾아 들판을 쏘다녔다. 그런 나를 너는 감상적이라고 놀렸지만, 너 역시 <춘천 가는 기차>를 들이며 4호선을 탈출하길 꿈꿨고 마왕을 신봉했으며, 제대로 사랑 한번 해 본 적 없으면서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을 들으며 울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너도 나처럼 그런 날이 있지 않을까.설거지를 하다가, 양치질을 하다가, 오후 다섯 시 일찍 저무는 해를 보다가, 맥락 없이 찾아오는 그 밤들의 노크에 울컥하지 않을까. 빼앗긴 것도 아닌데 나는 그 기억들을 손에 쥘 수 없는 것이 어쩐지 억울하다. 그러나 나는 너를 안다. 네가 지독한 삶의 풍파를맞아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지 않았다면, 내가 아는 너는 적당히 현실에 만족하며 틈틈이 옛날을 그리워하다가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냉정하게 말할 것이다. 다만 그리운 것은 이제는 없는 마왕이며, 닭갈빗집 주인과 다툰 이후로 두 번 다시 발을 내딛지 않는 춘천, 사랑을 몰랐기에 좋았던 김광석의 노래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여전히 너를 잘 안다고 믿고 싶다.


신유진 <열다섯 번의 밤- 너는>




몇 년 만에 다시 찾아와도 이런 곳에 카페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낡은 철제문 동그란 손잡이가 의심의 여지없이 어느 화장실 외형과 닮아있어서 열때마다 몸이 조심스러워지는 그 카페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 처음 만났던 문과 비슷한 철문을 한 번 더 열어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다행인 것은 두 번째 문틈으로 커피 향과 음악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노멀사이클코페


이쪽의 '똑똑'과 저쪽의 '네' 소리가 엇박자를 낼 때, 살짝 당긴 문손잡이 위로 언제 썼는지 모를 끝이 말려 올라간 포스트잇이 반동에 의해 흔들렸고, 가벼운 묵례 후 작은 창 너머 인왕산 자락과 칠이 벗겨진 테이블과 이제는 말라 버린 화분, 낡은 바닥과 L과 내가 자주 앉았던 모호한 자리의 바 테이블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 모두를 둘러보는데 삼 분도 채 걸리지 않을 만큼 작은 공간이었다. 십 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낯섦, 불편함, 거리감에 탄복하며 따뜻한 시다모 한 잔을 테이크아웃해 돌아 나오는 길에 이곳을 좋아했고, 저 사람을 좋아했던 L을 떠올렸다.

L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니 나는 그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나 싶다. L이 책 사이사이 채워줬던 마른 낙엽과 꽃잎을, 수수께끼 같았던 L의 필체를 흘긴 눈으로 보던 날들이 언제고 우리 사이를 이어 줄 거라 믿었다. 우리가 동묘 빈티지숍에서 건져 올린 성북동 표 카디건과 점점 마켓의 엄마 손지갑과 이상의 집과 엔드 앤드와 적선과 남대문 삼성사와 숱하게 찍었던 사진과 노멀사이클코페가 그럴 줄 알았지만, 이제 와 돌아보니 뭉툭하고 뭉개진 기억만 남았다.


노멀사이클코페

무수히 많은 것이 너와 함께 사라지는 동안 소멸되지 못한 몇 안 되는 장소와 몇 장의 사진을 건져 올린오늘은 그림자마저 스칠 리 없는 우리가 가까운 곳에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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