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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Aug 23. 2023

나는 왜 나인가

글을 위한 필사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신유진>


세계가 웃는다. 초승달을 닮은 눈이다. 시커먼 하늘에 자신의 일부를 숨기고 가느다란 미소만 내보이는, 너무 오래 숨겨 놓았다가 숨겨 놓은 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남은 웃음. 나는 세계가 감춘, 세계가 잃은 나머지 것들을 내 멋대로 상상했다. 시커멓게 가려진 그곳에는 토끼 같은 희망이 널뛰고 있을까. 세계가 웃고, 내가 웃고, 세계가 나를 바라보고, 내가 세계를 바라본다. 10초, 20초, 아니 초와 분과 시로 나눌 수 없는, 수심처럼 깊이로만 측정할 수 있는 정지된 순간. 나는 세계에서 나의 마음을 온전히 들키고 싶었으나, 또 껍질처럼 내 마음을 감싸고 있는 울퉁불퉁한 나를 들키는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 그의 눈에 감기는 것이 나의 축 처진 눈과 억울한 입매와 구부러진 이마 그리고 어깨에 묻은 피로한 삶일까 봐, 나는 나를 숨기기 위해 나의 마음을 숨겼다. "웃는 게 강아지 같네." 세계의 말에 얼굴이 달궈졌다. 나는 두 손으로 볼을 감췄으나 더 뜨거워진 마음은 가릴 길이 없어 벌거숭이로 춤을 췄다. 얼마나 붉었을까, 나의 마음은? 세계는 붉어진 벌거숭이를 봤을까?


신유진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_ 끝난 연극에 대하여>





그 밤하늘에는 취한 달 하나가 떠 있었고, 밤은 달려 나가 더 깊은 밤을 데려오고 있었다. 마주 선 붉은 볼사이로 뽀얀 입김이 퍼지는 추운 겨울밤에 품이 너른 불판 위에 삼겹살과 갓김치를 구워 먹으며 소주 두 병을 마시고 나왔기에, 추위와 상관없이 '통통' 배를 두드리며 행복지수가 막 올라가던 참이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라 술집의 영업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마음은 집으로 가야 한다고 했지만. 알코올은 좀처럼 지는 법이 없어, 우리는 가볍게 한 잔 더 하기로 했다. 밥집도 술집도 아닌 모호한 간판이 눈에 띄었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좁은 공간이 무색하게 아홉 개의 테이블이 있었는데, 인원 제한 눈속임 용인지 따로 앉은 것으로 보이는 일행 몇몇이 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앉은자리는 가운데 이인용 테이블이었는데,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친구가 와서 ‘한 시간 후에 영업 종료인데, 괜찮냐고 물어왔다.‘ 이미 부른 배와 상관없이 날씨 때문인지 뜨거운 것이 먹고 싶어 어묵탕에 소주 한 병을 시켰다.​


그때나 지금이나 없는 것은 자비요, 넘치는 것은 호승심인 S는 얼근하게 올라온 취기에도 내 술잔의 술이 비워지고 있는지, 혹여 자신만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매의 눈이 되곤 했다. 급하게 마신 술에 취하여 어깨와 고개가 삐뚜름해지는 것이 느껴졌을 때, 마주 보고 있는 똑같은 크기의 잔에 동일한 양의 소주가 부어졌고, 새로운 한 병의 술이 테이블에 놓였다.

그때 나는 일자드라이버 같은 눈으로 내 잔을 유심히 지켜보던 그의 한결같음이 좋게만 보였다. (잔을 감시하는 것뿐이었지만) 대쪽 같이 자신을 챙기는 것도, 농담을 적절히 섞어 분위기에 MSG를 흩뿌리는 것도, 무심한 듯 챙겨주는 것도, 어린아이 같은 면도 좋았다. 물론 하늘을 찌르는 것 같은 자신만만함에는 콧방귀가 나오곤 했지만, 그런 사람이 내 앞에 있으니 나는 무슨 말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이윽고 나는 두 손으로 탁자를 쾅! 치며 말했다.​


"나 좌파야!"

일순간 시장통 같은 술집 분위기가 잠깐 '꽁'하고 얼었다가 다시 소란스러워졌고, 바둑돌 같이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S의 웃음에 나도 덩달아 웃고 말았다.

한동안 그에게 "어이 좌파~ 좌파씨, 와 깜짝이야! 갑자기 탁자를...." 하다가 내 손에 입이 막혀 웅얼거리던 일이 잦았다. 요즘도 가끔 그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라디오 사연처럼 흘러나올 때면 술김에 사랑 고백도 아닌 뜬금없는 좌파 고백이라니, ‘나는 왜 나인가?’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가고 싶어 진다. 아무 말 대잔치 사이에서 흐트러진 기억을 블러 처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조차 너무 선명한 그 장면을 어쩔 줄 몰라 벌거숭이가 된 기분, 그런 벌거숭이를 갱신할 때마다. 나는 나로부터 조금 더 멀어졌다가 변호하다가 또다시 이상한 나를 만난다. 나는 어디까지 변화무쌍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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