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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Aug 28. 2023

선착순 10개입니다!!

글을 위한 필사 <소비단식 일기, 서박하>


마음이 허전할 때, 내 삶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 뭔가를 사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돌아보면 오랜 시간 공부를 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도 장기간 성취가 없는 상태를 견디는 것이었다. 육아를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마감일도, 뚜렷한 성과도 보이지 않는 일들을 계속하다 보니 결국 마음이 지쳤다. 빈 마음을 소비로 채우려 했다. 소비는 내가 이룰 수 있는 가장 쉬운 성취였다.


서박하 <소비단식 일기_소소하지만 확실하게>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앉아 택배 봉투를 언박싱했다. S가 술에 취한 밤. 어느 앱 라이브 방송에서 구매했다던 그것. 자기도 뭘 샀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선착순 10개입니다." 이런 소릴 들으며 무언가에 홀린 듯, 버튼을 눌러 당첨된 것이라 했다. 당첨? 당첨이라면 응당 돈을 지불하지 않는 걸 말하는 게 아닌가?

“이거 클릭만 하면 공짜였어?”

“응? 아니?” (뭐 그런 질문이 있어? 하는 표정)

“근데 왜 당첨이야?” (당첨이라 매? 하는 내 표정)

“아니 돈은 냈지. 내가 선착순 10명 중에 됐어. 엄청나지?” (그럼 그렇지, 어휴)


​어쨌거나 그 대단한 ‘선착순’ 좀 볼까? 하며 회색 봉투를 뜯으니 야무지게 싸맨 뽁뽁이가 나왔고 뽁뽁이를 해체하고서야 만난 ‘선착순’ 아닌 ‘선착순들’을 보고 “이게 뭐야” 하면서 둘 다 빵 터졌다. 납작한 박스 안에 든 것은 애매하게 큰 하얀색 하트 거울이었고, 투명 비닐봉지에 든 것은 흐물흐물한 꽃 모양 젤 펜 네 자루와 너무 화려해 눈부신 곰 모양 그립톡 세 개, “이거 내가 산 거 아닌 것 같다” 하던 유아 파우치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어쩐지 언박싱이 하나도 떨리지 않더라니(이유가 있었지, 뭐야...) 한바탕 웃음 뒤로 도대체 이걸 왜 샀냐는 나의 타박에 우물쭈물하며 다들 하트를 쏘니까 마음이 급해졌다던가, 당첨에 성공한 뒤에 뿌듯해하며 잠을 잤다던가 하는 그의 말에 헛웃음이 났다. 완곡한 거절에도 거울, 그립톡, 파우치, 젤 펜을 기어이 내게 준 그에게. “취향 존중 같은 건 없어?” 묻자, 나를 향해 한껏 눈을 흘기던 그를 등지고 걷는 내내 웃음이 났다. 리스트만 바꾸면 우리 사이에 자주 일어나는 대화였기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다급히 주문을 넣고 뿌듯해했을 그의 얼굴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팀원들 사이에서 타격감 좋기로 유명한 나의 최후는"아이 눈부셔 그립톡" 하는 소리에 눈을 질끈 감는 못난이가 되었던가? 책상 위 거울을 본 회사 동생이 "이 언니 자기애 장난 없다" 큰 소리로 말하는 통에 사람들 사이에서 아뿔싸 블루스를 췄던가? 하는 있을 법한 작은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소비 단식 일기를 읽으며, 이것도 내 얘기 같고 저것도 내 얘기 같아서. 쓰지도 않은 일기장이 공개되는 것 같은 기분에 자주 머쓱하고,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 셀 수 없는 다짐을 했지만. 나도, S도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도 소비로 이룰 수 있는 가장 쉬운 성취에 맛을 들린 사람들이 아닐까? 하며 물귀신 작전을 써보고 싶어졌다. 나는 아직 빚쟁이고, 월급은 반토막 난 채 입금과 동시에 작별을 고하지만 가계부에 크고 작은 구멍을 만들며, 그것을 작은 성취라고 여기는 삶도 누군가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나쁘지 않은 삶이라 여기며 유예기간을 두기로 했다. 물론 언젠가는 뼈 때리는 아픔으로 '소비 단식'을 해야 할 날도 오겠지만. (이 책을 사준 사람이 S였는데, 소동의 원인도 그라니... 게다가 소동에 관해 이야기해 주니, 뻔뻔하게 나를 인싸로 만들어 줬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했다.)  앗싸겠지... 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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