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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Aug 27. 2023

떠나지 않기에 돌아올 일 없는 사람

글을 위한 필사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무루>


1,2년에 한 번쯤은 멀리 떠나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던 때도 있었다. 여행이 없는 삶은 시시하고 나태한 인생인 것만 같았다. 인생의 진짜 재미는 여기가 아닌 저기 어디쯤 있는 걸까 깊어 차곡차곡 세계지도에 도장을 찍듯 여권을 채워 나가자고 다짐하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한편으로는 숙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서른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여행을 좋아하지 않은 인생도 있다는 것을. 그렇다고 지난 여행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긴 비행 끝에 낯선 대륙에 도착할 때마다 세계의 물리적 크기를 실감하는 일은 설레고 즐거웠다. 교집합이 없는 대상에 대해 감응하고 교감하는 기쁨을 경험했고 텅 빈 것 같은 마음이 일순간에 가득 차오르는 불가해한 충만감도 느꼈다. 어느 도시에서나 예측할 만한 작은 불운과 행운이 교차했고, 생경한 긴장 속에서 일어나 불안과 즐거움이 뒤섞인 하루를 보내고 나면 낯선 피로감 속에서 꿈 한 번 꾸지 않고 기절한 듯 달게 잤다. 안팎으로 날이 선 감각이 만들어 내는 생각의 파장은 나를 자주 흔들었고, 까맣게 탄 거울 속의 나는 평소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 빨지 못한 옷가지들이 가득 든 트렁크를 끌고 돌아와 익숙한 내 집 현관문을 열 때의 포근한 안도감을 동력 삼아 일상을 활기차고 건강하게 이어 나갈 의지를 다졌다. 그렇게 짧은 여행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할부로 끊은 비행깃값과 함께 긴 여운이 찾아왔다. 일을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자려고 누웠다가도 나는 자주 여행의 시기를 복기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옆모습이나 뒷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넘치거나 모자랐던 순간들이 꼬리를 물었고 일상의 틈에서 비일상의 기억을 날마다 조금씩 재편집했다.


무루(박서영)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_여행을 가려고 집을 부수다니





코로나 종식과 함께 주변에서는 앞다투어 여행을 계획했고, 동료 중엔 한풀이하듯 이미 네 번의 여행을 마친 상태로, 왕복 여덟 번이나 비행기를 탄 셈인데도 다음을 기약하는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들으며 "좋으냐?, 네가 좋다면 나도 좋다." 같은 사극 톤 말들을 건네면서도 나의 내면의 뿌리는 낯선 곳에 대한 동경이나, 긴장감, 이방인으로서 오롯이 겪는 외로움으로 맞이하는 풍경 같은 것이 그리운 동시에 내가 좋아했던 곳들도 잘 있는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들이 여행을 반복하는 동안 "여기가 그렇게 좋대." 하며 첨언하는 것이 전부라 안 그래도 씁쓸한데, 요~ 귀여운 것들이 떠나면서 한두 가지씩은 일을 맡기고 가는 통에 없는 볼살에 바람을 잔뜩 넣어, "이것들이 다 놀러 가고 나한테 일만 시켜." 하나 마나 한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당분간은 나 스스로를 '떠나지 않기에, 돌아올 일 없는 사람'으로 명명했기에 기왕이면 그들의 여행이 별 탈 없이 마무리되길 바라기도 했다. 잘 떠나, 잘 돌아오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으니까. 일을 더 한다고 누가 칭찬해 주는 것도 아닌데, 시샘하지 않는 착한 마음에 스스로 감동을 한 주먹 집어삼키면서 말이다.


​코로나가 발현되었던 시기와 거의 동시에 작은 평수의 아파트를 장만했다. 장만이라곤 하지만, 뉴스나 주변에서 말하는 것처럼 빚으로 장만한 집이었기에 꼬박 삼 년을 넘게 카드값과는 별개로 월급은 승냥이(은행)의 습격을 받아(집의 일부는 그들의 소유겠으나, 떼어가는 이자가 무지막지하여 내 맘대로 승냥이라 부르겠다.) 항상 반 토막 난 상태로 입금되는 불행과 이 빚만 갚으면 내 집이라는 행복 사이를 줄타기하는 중인데, 지금이 쪼들려 너무너무 싫다가도 사고 싶은 피규어를 두세 개쯤 가질 수 있으면 그건 또 그것대로 행운이라 여기며 떠남으로써 더해질 마이너스를 감당하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의 무루 작가처럼 여행하기 좋아하고, 언어는 약해도 여행 한정판 똘똘이로 변신하며, 평소엔 길치에 가까운 내가 여행만 가면 인간 내비게이션이 되는 등을 포함, 타국의 마트를 사랑해, 조미료나 술을 싹쓸이하는 상상만으로 입꼬리가 쓱 올라간다. 그때도 여전히 나는 일일 다섯 끼쯤은 너끈히 해치우고, 기운이 펄펄 끓어올라 하루를 촘촘히 엑셀 시트에 정리해 실행하는 극 JJJ형 (소비 단식은 왜 못하냐, 이 헛똑똑이야!) 인간의 기억을 되살려 떠날 수 있겠지. (빚도 청산했을 테고) 그날까지 나는 미뤄둔 책을 꺼내 읽고 도서관을 앞마당처럼 여기며 글 속에서 구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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