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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Aug 29. 2023

볶아치는 삶에 대하여

글을 위한 필사 <오래오래 좋아하기 위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한수희>


전에 독자와의 만남 행사 때 내 책을 읽었다는 어떤 분이 "그렇게 무기력한데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시나요?"라는 취지의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을 받고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요, 저는 무기력하지 않은데요. 저는 늘 제가 성인 ADHD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어요." 그 대답을 들은 독자도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무기력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분은 왜 내가 그럴 거라고 짐작했을까? 오히려 나는 쓸데없이 에너지가 넘쳐서 탈이라고 믿어왔다. 보통 때 나는 반드시 해야 할 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만 한다. 나머지 시간에는 그분이 말한 것처럼 무기력하게 널브러져 있다.(무기력한 게 맞다.) 아니, 적어도 그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머릿속은 내 걱정, 자식 걱정, 가족 걱정, 나라 걱정, 지구 걱정으로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지만 아무튼 몸은 무기력하다. 그런 내가 가끔 기운이 뻗쳐 각성제라도 먹은 사람처럼 잠도 자지 않고 꼭 하지 않아도 될(하지 않는 것이 좋을) 일을 할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조증이 도래하는 시기다. 그때 나는 무얼 하느냐 하면, 김치를 담그거나 머리를 자른다. 그것도 밤 11시가 넘은 시각에. 밤 11시에 자르는 머리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밤 11시에 담그는 김치 역시 제대로 된 김치가 될 리 없다. 조증의 폭주 기관차를 탄 나는 배추가 소금의 삼투압에 백기를 드는 인고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나는 2분 간격으로 배추를 뒤집어 본다. 배추는 휘어지기는커녕 뚝뚝 부러진다. 어느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나의 조증과 타협한다. 이 정도면 됐어(조증은 이성마저 마비시킨다) 나는 거의 생배추와 다름없는 배추에 양년을 묻히기 시작한다. 철저한 준비와 합당한 필요가 아닌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하는 일이기에 갑자기 재료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도 부지기수다. 고춧가루를 꺼내다가 바닥에 쏟고, 그 뚜껑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다. 괜찮아. 일단 담그자. 그렇게 부엌은 고춧가루 폭탄을 맞은 꼴로 변하고, 내가 담근 김치는 아무리 관대하게 보아도 김치라고 할 수가 없다. 한두 번은 샐러드 먹는 기분으로 먹다가 그냥 냉장고 속에 처박아두는데, 한 달쯤 지나 꺼내면 익은 건지 상한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다. 나의 조울증은 명백하게 외가 쪽의 유전이다. 외할머니가 나와 똑같았다. 외할머니의 상태는 둘 중 하나였다. 어두운 방에 웅크리고 앉아 신세를 한탄하거나, 구십이 가까운 나이에도 지팡이를 짚고 굳이 가지 않아도 좋을 곳까지 씩씩하게 걸어 다니거나, 누구에게나 핸디캡은 있는데, 그건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인생에 하등의 도움이 안 될 때가 태반이지만 그래도 잘 구슬려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 한다. 유전인 이상 내가 이 조울증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급한 일, 반드시 해야 할 일,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은 조증의 시즌에 신속하게 처리한다. 이 시기에 나는 자신감에 차 있고 세상에는 못 할 일이 없어 보인다. 나는 행운아의 운명을 타고난 것만 같고 내 앞날은 고속도로를 넘어서 아우토반이다. 나는 미친 듯이 액셀을 밟는다. 천천히 달리는 차들을 휙휙 추월하고 한가로이 도로를 건너는 양 떼도 치면서. 이때 나는 집에서 자른 것이 명백한 단발과 상한 김치를 갖게 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그저 이때를 즐기는 수밖에. 이제 곧 울증의 시간이 올 테고, 머리는 자랄 테고, 김치는... 김치는 버려야 한다.


한수희 <오래오래 좋아하기 위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_한밤중에 머리 자르기>





나는 내가 조증이나, 울증의 경계로 나뉘는 삶을 산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이 글을 읽으며 밤 11시에 머리를 잘랐다는 부분에서는 굳이? 해놓고, 김치를 만드는 부분에서는 너무 웃겨서 킥킥거리다가 '괜찮아 일단 만들자'라는 말에 꽂혔다. 이거 내가 만들기에 과몰입할 때 나오는 그거잖아? 만들기를 좋아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너무 많은 만드는 것은 나쁘다. 재료비는 상승하고, 동시에 피로가 쌓인다. 나는 대체로 무언가를 만들 때, 일단 자신감이 넘친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그렇게 생겨 먹은 것 같다. ‘내가 이럴 줄 알았대도’ 결과물에 도취한 상태로 신이 나서 서너 개씩 더 만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하나만 있으면 포인트가 되고 좋을 게 집 안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볼 때마다 심란해지는 물건 중 단연 일등은 타일 테이블인데 나는 이걸 인테리어 전문 사이트에서 발견하고, 거의 눈이 돌아가서는 티 코스터용 타일, 트레이용 타일처럼 작디작은 것부터 만들다가 화분 받침용 큐브 모양으로 일곱 개 정도를 만들고, 두 사람 정도는 나란히 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용도로 두 개를 더 만들었다. 타일 본드와 줄눈 시멘트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비싼 타일과 MDF용 상자를 원하는 크기로 제작해서 받은 후 만들기 상태로 돌입하는 순간 나는 살짝 미쳐있다. 밥도 안 먹고, 허리도 못 펴고, 잠도 안 자고, 마감에 쫓기는 타일공이 되어 행여 타일이 삐뚤게 붙여질까, 타일 본드를 말리는 시간의 격차를 제대로 두지 않아 후작업을 할 때, 줄눈이 깨질까 봐 노심초사한다. 노동의 시간과 노력을 생각해 봐도, 아니 이 작은 집에 그 무거운 게 이렇게 많을 이유도 없는데, 만들기를 시작할 때 나는 시간이 지나 돌아봐도 납득이 안 된다. (나는 왜 항상 이 모양인가….)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 하면 몇 개는 선물과 나눔을 했고, 베란다에 있던 큐브 박스는 아파트 배관 청소가 있던 날, 너무 많은 물이 한꺼번에 내려와서 젖는 바람에 폐기물이 되었고 (MDF 합판에 타일을 붙이는 방식이라 물에 취약함) 이제 우리 집에는 300*300 큐브 1, 300*600 큐브 2, 테이블 2 이렇게 총 다섯 개의 타일들이 남게 되었다. 사용하며 이리저리 옮긴 탓도 있겠지만, 바닥에 가루 같은 것이 보이면 어김없이 타일 테이블에서 떨어져 나온 각질 아니, 줄눈이다. 게다가 무겁기는 또 아주 무거워서 혼자 뭘 하려고 하면 낑낑대기 일쑤라 나는 정말 그때의 나로 돌아간다면 '적당히 좀 해'라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때는 타일 테이블이 유명해서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하나쯤은 만들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 이름도 어려운 미드 센추리 모던 USM 모듈 가구가 인기라서 다들 거기에 빠진 것 같다.


나는 우리 집에 차고 넘치며, 게다가 아주 무거운 타일 테이블 다섯 개의 공간 확보 때문에 감히 그것을 만들 엄두도 못 내고 있다가, 최근에 집들이 선물로 모듈 선반을 하나 만들어 선물해 주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자꾸만 떨어지는 줄눈 때문에 유지 보수가 필요해서 언젠가 지금의 줄눈 모두를 긁어내고 다시 작업하는 날이 올 같은데, 그때도 나는 미친 듯이 거기에 매달려 있겠지. 밥도 안 먹고, 허리도 못 펴고, 잠도 못 자면서 안달복달 나를 볶아치며 <오래오래 좋아하기 위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이 책의 제목처럼 나는 정말 그게 필요하다. 그런 당연하고, 어려운 마음이 항상 필요하다. 과유불급이라 했거늘 어째서 나의 만들기는 정신 차려보면 다다익선으로 빠져있는지. 언젠가는 작가의 샐러드 김치처럼 타일 테이블 몇 개 정도는 버릴 날이 올 수 있겠다. 폐기물 장소로 옮기면서도 무겁다. 후회하면서 그리고 또 언젠가... 테이블들이 사라진 자리를 또 다른 것들로 채울 내가 두렵다. 만들기 취미를 취미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몰두할 내가 두렵다. (미래의 나에게 미리 당부한다. 어떤 걸 하든 적당히 좀 하자고)



당부가 무색하게, 스트립퍼로 기존 줄눈을 긁느라 바들바들 떨었다. 모든 걸 잊은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신을 차렸을 땐 작업했던 방이 시멘트 먼지로 가득해서 방바닥 닦기만 스무 번 이상을 해야 했다. 그렇게 아이보리 테이블은 코코아색 줄눈으로, 녹색테이블은 사용하며 떨어지고 깎여나간 빈 곳을 채우는 것으로 찌뿌둥하게 작업을 마무리했다. 긁어내고, 채우고, 닦고 또 닦고 채우고 또 채우며 두 번 다시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겠다. 또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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