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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Aug 30. 2023

그 말이 참이면 좋겠다.

글을 위한 필사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신유진>


그러네. 오래 기다리면 잊지. 크리스마스에 오지 않는 산타를 오래 기다리다 잊었고, 전학 간 단짝 친구의 편지를 오래 기다리다 잊었으며, 어쩌면 무언가 되지 않을까 품었던 희망을 오래 기다리다 잊었는지도 모르지. (...) 우리는 무언가를 너무 오래 기다리고 있다. 무엇일까? 우리에게 오지 않는 것은, 앞으로도 오지 않을 그것은,


신유진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_ 끝난 연극에 대하여>





어느 해 여름 엄마의 집에 갔을 때, 거실 한편에 작은 식탁이 놓여있었는데, 그것은 원목의 중후한 느낌도 고급스러운 색도 지니지 못한 의자가 두 개 딸린 작고 평범한 정사각형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야를 확보하지 않아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작은 거실에 놓인 식탁은 미처 처리하지 못한 못처럼 불뚝 솟아나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엄마는 '동네 사람들을 따라갔다가 가구점에서 12만 원에 사 온 것'이라며 그런 것을 사는 것이 사치라고 생각했으나, 집에 들이고 보니 의자에 앉아서 하는 모든 것이 좋다고 했다. 일상 속 좌식 생활이 무릎에 주는 영향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내가 겪는 불편이 아니니,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라 처음 식탁에 가졌던 마음이 되려 미안할 지경이었다. 곧장 엄마에게 ‘잘했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그 의자에 앉아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고, 수다를 떨었다. 나를 온전히 맡길 수 있을 만큼 편안한 의자는 아니었지만, 엄마가 좋아하는 엄마의 식탁이었다. 그다음에 갔을 때, 의자가 삐거덕거리길래 옆으로 뉘어 드라이버로 나사를 조여줬더니, '엄마는 소리도 안 나고 다시 새것이 된 것 같다'하며 좋아했다. 하지만 그 의자는 새것이 아니었고, 여전히 불안전한 것이었다.

언젠가 그곳에서 밥을 먹던 오빠가 의자를 탓하기 시작했고 되는 일, 하나 없는 자기 일이 마치 그 식탁 때문인 양,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때 오빠는 어디서 술을 마시고 온 건지 조금 취한 상태였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죽거리는 그 뻔뻔한 입이 싫었다. 급기야 오빠의 입에서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엄마 딸 돈 잘 벌잖아. 다 쟤한테 다 해달라고 해."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해서 더 많은 것을 바란 적도, 바랄 만큼 해준 적도 없는 환경이었기에 엄마에게 오빠는 조금 더 아픈 손가락이었을 것이다. 가장 역할을 원하지 않으니 행여 짐이 될까, 무엇을 강요하거나 권하지도 않았다. 그래봐야 설, 명절에 한 번씩 내려와 하룻밤 잠도 자지 않고 가거나, 그마저도 몇 해 전부터는 띄엄띄엄 연락하지도 받지도 않음으로써 엄마 속을 뒤집어 대던 그 하나뿐인 아들이,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올 땐 가족들이 깰까 봐 뒤꿈치를 들고 걷던 오빠가 "그만 좀 하라"는 내 말과 눈빛에 돌아 식탁에 있던 반찬들을 내동댕이쳤고, 밥공기 하나가 내게로 날아와 귓불을 아리게 했다. 엄마는 “부모 앞에서 이런 새끼가 어디에 있냐"며 울분을 토했고, 오빠는 그 길로 짐을 챙겨 나가 버렸다.


​그게 칠 년 전 일이다. 남보다 못한 가족으로 어쩔 수 없이 묶여버린 서글픈 사람들. 불화의 불씨를 피운 건 삐거덕거리던 의자였을까, 오빠의 눈에 대단해 보였던 실은 별거 없는 나였을까, 모든 게 망가져 버렸다고 생각한 자신이었을까. 그저 구실을 찾고 있었던 것뿐이었겠지...


​오래 기다리면 잊는다는 그 말이 참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더는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때마다 문간을 서성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받지 않을 전화를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가 더는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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