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위한 필사 <일기시대, 문보영>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설명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대신 프라이빗한 느낌을 주면서 상황을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묻는다면 모든 말에 "비밀이에요."로 퉁치면 좋다. 누군가 내게 말 거는 게 싫을 때 이용하면 된다. 일명, 비밀로 발라 버리기, 비밀로 조지기 수법인데......
<예시>
- 오늘 날씨 좋죠?
- 비밀입니다.
- 토마토 스파게티랑 리소토 두 개 시켜서 나눠 먹을까요?
- 비밀입니다.
- 좋을 하루 보내세요!
- 그건, 비밀입니다.
- 비를 맞고 계시군요. 우산 같이 쓸래요?
- 비밀이에요.
- 내일 언제 볼래요?
- 비밀입니다.
이렇게 비밀 머저리, 비밀 꼴통이 되면, 당신을 겪어 본 사람은 당신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쟤한테 말 걸지 마......" 하고 안내해 줄 것이고, 그 덕에 사람들은 점차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며, 그 결과 당신은 혼자가 될 테지만, 어느 날, 모든 말에 비밀이라고 말하는 당신을 갑자기 이해하고 깊이 사랑할 유일하고 특별한 단 한 사람을 만나게 되기 때문에, 그 사람과 내밀하고 정겨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문보영 <일기시대_비밀머저리>
S는 종종 자신과의 이야기를 쓰는 것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트루먼이 된 기분이야." 뭔가 속고 있는 기분이 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 기가 차고 꼴사납게 스쿼시를 패한 후 나의 소심한 복수는 엔딩을 맺지 못하였기에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꽁하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예시 아니고, 있었던 일>
- 탁구 사부님한테 가봤어?
- 비밀이야.
- 갔구나?
- 비밀이야.
- 갔네, 갔어!
- 비밀 이래도
- ......
- 비-미-일.
그가 말을 걸 때나, 눈만 마주쳐도 비밀 프레임을 냅다 씌우자,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은 실로 '꿍꿍이 머저리 비밀 대작전'에 휘말린듯했다. 하지만 나의 '비밀' 내공은 시인의 '비밀로 발라버리기'보다 한참은 하수, 모지리라서 곧 밑천을 드러내고 말았는데, 계속해 비밀을 쓰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말하고 싶어 안달 난 촉새 같은 입이 대립구도를 만들고, 그 사이 멀리서 뛰어온 질문이 '그래서 너 탁구 배울 거야? 말 거야?'(이건 나한테 하는 질문)가 떠오르자마자 나는 뭔가 태생부터 배배 꼬인 꽈배기처럼 몸을 꼬아대며 탁구장 방문 후기, 감상평 등등을 낱낱이 그 옛날 조선의 죄인처럼 사또께(S에게) 이실직고하고 만다. 너무 궁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탁구를 할 수 있을지, 나를 잘 아는 타인의 입에서 그 답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과가 어찌 되었느냐 물어본다면 나는 또 "그건 비밀입니다."라고. 비밀 파티를 이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