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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Sep 05. 2023

사시사철 모락모락 길

글을 위한 필사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한수희>


교토에는 '철학의 길'이 있다. 오래전 이 도시에 살던 유명한 철학자가 종종 걸으며 생각에 잠기던 길이라고 한다. 나는 이 길을 너무나 좋아해서 교토에 갈 때마다 매번 들른다. 포석이 깔린 산책로를 따라 나무들이 울창하고, 돌로 담을 쌓아 만든 아름답고 좁은 수로가 길게 이어진다. 걷다 보면 군데군데 교토의 유명한 사찰들이 자리하고 있다. 주변으로는 고풍스러운 주택들, 평범한 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주택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관광객들이 간혹 보이기는 하지만 대게 고요하다. 가끔은 무서울 정도로 사람이 없는 코스도 있다. 홀로 걷고 있는 관광객을 본 적은 있지만 동네 아주머니가 슬리퍼라도 끌면서 홀로 걷고 있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은 이런 풍경이 너무 당연해서 도리어 산책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 되는지도 모른다. 이놈의 철학의 길, 지긋지긋해! 하지만 나는 그 동네에 살고 싶다. 매일 철학의 길을 산책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나는 슬리퍼를 끌고서라도 열심히 산책을 할 위인이다. 그런다고 내가 철학자가 될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러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철학의 길을 걷고 있어. 이건 우리 동네에 있는 철학의 길인 거야.' 갑자기 웃음이 난다. 애초에 그 유명한 철학자도 그 길이 철학의 길이라서 걷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걷다 보니 철학의 길이 된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의 산책로가 다시 보인다. 집을 나와 버스 정류장을 지나 언덕을 넘고 주택가를 구불구불 지나 경기장의 트랙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집으로. 그 길을 걸으면서 나는, 철학자도 아닌 나는, 딱히 철학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세상의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한다. 딱히 즐거울 리가 없는데 딱히 즐겁다.


한수희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_나의 철학의 길>







나 역시 긴카쿠지에서 에이칸도까지 이어지는 폭 좁은 수로와 그보다 좁은 길과 길가의 집들을 좋아했다. 교토를 좋아해, 일본의 그 어느 도시보다도 자주 가고 오래 머물곤 했다. 언젠가 한 번은 철퍼덕 배를 깔고 누워 무념무상 해탈한 듯한 시바견 한 마리와 마주쳤는데 조용한 동네만큼이나 조용한, 사실 강아지라 부르기엔 컸던 그 개는 시종일관 나의 구애를 외면하고 있었는데, 마침 귀여운 할머니가 문을 열고 나오셔서 실례를 무릅쓰고 사진을 부탁드리니, 아이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시곤 호-잇-짜!! 그 큰 개를 들어 올리셔서 크고 작은 귀여움이 백만 번쯤 충돌한 사진을 찍어 들고서 연거푸 감사 인사를 드린 기억이 생각났다.


내가 사는 동네 멀지 않은 곳에는 사시사철 모락모락 길이 있다. 좌측에는 논, 우측에는 하천을 품은 길. <철학의 길>과는 다르지만 생명이 꿈틀거리는 그 길에는 이름 모를 철새나 청둥오리들이 유영하고 텅 빈 논에는 거대한 마시멜로가 듬성듬성 빈길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사계절 중 겨울에 그 길을 자주 찾았다. 새하얀 눈이 어지럽게 흩어지다, 쌓이는 날. 아무도 밟지 않은 길로 힘주어 걷다 보면 흰 솜옷을 입은 크고 작은 나무 사이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작은 소리에도 민감한 철새들이 수풀에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모습, 그들의 배밀이를 보고 있자면 조그만 물결 따라 기어코 하나가 되고 마는 풍경 속에 내가 있다.


발이 꽁하게 얼어붙고, 코가 떨어져 나갈 때쯤, 주머니에 넣은 손이 머쓱해질 때, 풍경에서 멀어져 집을 향해 걷는다. 언제나 몇 장의 사진과 깨끗해진 생각과 글감들을 수집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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