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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Sep 13. 2023

단신 여성의 슬픔

글을 위한 필사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한수희>


얼마 전 마트에 갔다가 남들보다 머리 두 개만큼 더 큰 여자가 카트를 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남편은 그 여자를 보고 '다 큰 여자가 카트 위에 올라서 있네' 하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여자의 발은 바닥에 닿아 있었고 그 여자는 그냥 큰 여자였다. 아마 190 센티는 족히 되었을 것이다. 옆에는 남편인지 남자친구인지가 있었는데 그 여자보다 머리 두 개만큼은 작은 남자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우리도 행복하게 산다. 나름대로. 태어날 때부터 단 한 번도 작은 사람이었던 적이 없는 나는 단신의 여성으로 사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키가 작은 사람이 키 큰 사람을 부러워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모른다. 매일 아침 키 작은 사람으로 눈을 떠서 하루 종일 키 작은 사람으로 살아가며 결국 키 작은 사람으로 잠자리에 드는 사람의 마음을 내가 알 리가 없다. 잘난 척이 아니다. 키가 커서 내가 득을 본 일이 있을 것 같은가. 없다. 놀림을 받거나 눈에 띈다고 농담거리가 되거나 더 혼이 난 적은 많다. 옷이 맞지 않고 신발이 작고 머리가 닿고, 그런 경험은 수도 없다. 무리에 끼고 싶어도 나는 잘못 고른 쭉정이처럼 튀어나와 있다. 그래서 나는 박나래의 옆에 서 있는(때로는 박나래를 옆구리에 끼거나 목을 잡고 질질 끌고 가기도 하는) 장도연을 볼 때마다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부끄러움과 어색함으로 얼룩진 나의 유년이 주마등처럼 흘러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장도연을 좋아한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건 꿋꿋이 농담을 던질 줄 아는 여자란 얼마나 멋진가. 키가 크면 보통 이런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살게 된다.

"뭐 먹고 그렇게 키가 컸어요?" (밥입니다.)

"키 커서 좋겠다." (대체 좋을 일이 뭐가 있는지 한번 바꿔서 살아보시겠습니까.)

"농구 선수예요?" (몸치입니​다)

그런데 그 말들 중 가장 황당한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이것이다.


"그 키, 나 좀 잘라 줘요."​

농담을 잘 받아치지도 못하고 요령이라곤 없던 진지한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진땀을 뻘뻘 흘리곤 했다.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세월이 흘러 나는 40대가 되었다. 이제 나 정도의 키는 나이 든 여자 '치고는' 좀 크다 싶을 정도로 키 큰 여자들이 많아졌다. (...) 몇 개월 전, 허리가 아파 물리치료를 받으러 간 적이 있다. (...) 물리치료사는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였는데, 다정하고 솜씨 좋은 사람이었다. 아주머니는 내 허리에 핫팩을 대어주고 아픈 부위에 패드 같은 것을 붙인 후 전기치료도 해주고 젤을 묻힌 방망이 같은 걸로 마사지도 해주었다. 아주머니는 커튼을 친 어둑한 공간에서 내 허리를 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치 이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는 것처럼. 그래, 이 많은 사람들이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야. 다정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누가 나에게 잘해주는 게 좋아서, 케어받고 싶어서. 나는 응석받이가 된 것처럼 그 기분을 한껏 누렸다. 어린 아이나 고양이가 된 것처럼 친절 속에 푹 파묻혀 허리를 지지고 두드려 맞았다. 그러다 아주머니는 자기 아들 이 이야기를 꺼냈다. 아들이 스무 살이 넘었는데 키다 170센티도 안 되어 고민이라고 했다. 나는 키 커서 딱히 좋을 것도 없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신기해하면서 예의 그 한마디를 던졌다.

"그럼 그 키 나 좀 떼 줘요."

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제발 가져가십시오."


우리는 커튼 안에서 함께 웃었다. 키 큰 여자로 살면서 농담을 받아칠 줄 알게 되는 데 무려 40년이 걸렸다.


한수희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_장신여성의 유머감각>





ㄴ 일.

어렸을 때는 그저 작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았다. 나이를 더 먹자 '동안'의 기준을 키로 보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가령 같은 나이대 A와 B가 있다. A는 단신, B를 장신이라 해보자. A는 동안이고, B는 동안은 아니지만 제 나이만큼으로 보인다. (이 정도면 선빵이다) 아마 이 둘은 어렸을 때, 각각 도토리와 수수깡으로 불렸을 테고 나이 들어서는 종종 놀림받으며 살다가 둘이 동갑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아 동갑이었어?' 하곤  곧 따라오는 말이란 것이 이런 거다.

아, A가 키가 쯕어서 ('쯕어서'는 작아서를 더 강하게 표현하고 싶을 때 쓰는 근본 없는 단어다)

훨씬 더 어려보리는 것 같다.

......?​


아니, 어떻게 생각이 글로가? 어렸을 때는 주야장천 도토리 같은 키 때문에 놀림을 받으며 일 등도 아닌 일 번을 면치 못하고 살아왔는데, 쭉정이들 사이에 끼여 자란 잡초처럼 구겨진 채로 살아왔건만 나이 드니까 키가 작아서 어려 보인다고? 이게 K 문화권에서 키로 놀림받으며 한평생 살아온 날들에 대한 보상인가? 정말 키가 작으면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ㄴ이.

누군가 의자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서 있다고 가정해 보자.


a. 나는 그의 정수리를 보며 눈을 깔고 대화할 수 있다.(기분이 좋다)

b. 그 사람이 책상에 걸 터 앉는 즉시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있을 정도로 평등해진다.

c. 그 사람이 일어서는 순간... (절망한다)

어느 날 평발도 신을 수 있다는 발 편하고 키 커지는 샌들을 사서 회사에 신고 갔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것이 싫었던지 K는 나더러 '내려오라' 했고, G는 "몰라보게 키 커졌네" 했다. 사람들은 내가 인공적으로 커지는 것이 싫은 걸까? 그런 류의 신발을 신을 때마다 매번 알은척을 했다. 퍽 난감하여, 납작한 반스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신발이 그게 뭐냐며 아동화인지 묻는다. 사이즈를 묻고 215MM (반스는 원래 크게 나온다)라고  말하면 초등학교 5학년인 우리 딸보다도 작다고 하거나, 한 술 더 떠 자신의 애들 거를 주겠다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아 나도 취향이라는 게 있잖아?) 단신 여성에, 작은 발로 사는 것은 그런 것이다. 농담이겠지만, 농담에 꿀밤을 때리고 싶은 마음을 들킬까,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ㄴ삼.

내게는 미자라는 장신 친구가 있다. (원래 이름은 미정인데, 애칭이 미자다) 미자가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우리는 항상 붙어 다녔는데, 미자는 단 한 번도 나의 키 작음을 놀리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어설프게 큰 애들이 나를 놀렸던 것.  작가님과 키가 비슷한 미자의 실체가 대인배였다니... 미자는 이 순간에도 '대'가 붙는구나. '소'인배인 나는 줄곧 도토리같이 작은 내 키만 생각하고 수수깡처럼 키가 큰  사람은 마냥 옷 테가 좋은 줄로만 알았다. 단점 같은 건, 십 원어치도 없는 줄 알았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장신 여성의 유머감각> 편을 읽으며 '저마다 고충은 있군'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키가 작은 것보단 큰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의 떡 짱 커 보임) 그렇담 7만 원짜리 바지를 샀을 때 나처럼 3만 원어치를 잘라 내진 않을 텐데... 떼어줄 키는커녕, 그린벨트라도 걸어 보호하고 싶은 키가 해마다 줄어드는 것에 괴롭진 않을 텐데... 키가 커서 좋을 것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키 커봤으면!! 키- 키- 키- 키 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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