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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Oct 01. 2023

몸치들의 재롱잔치

글을 위한 필사 <고르고 고른 말, 홍인혜>


내 몸은 더 이상 최신품이 아니었다. 수십 년을 되는 대로 굴린 끝에 중고장터 식으로 말하면 "생활 기스가 있고 사용감이 있습니다."로 묘사되는 몸이 되었다. 한때는 갓 놀이공원에서 사 온 풍선같이 팽팽하고 가볍게 떠다녔는데 이제는 쭈글쭈글 주름이 잡히고 묵직해져서 바닥에 내려앉은 다음 날의 풍선이 되고야 말았다. 낡은 것, 중고품, 헌 것 같은 단어를 되뇌며 울적해하다 대학 신입생 시절이 떠올랐다. 선배들은 갓 대학에 입학한 우리들을 "새내기"라고 불렀다. 얼마 전까지 암흑을 전신에 휘감은 수험생이었던 내가 새내기라니. 밝고 산뜻하고 풋풋하고 그야말로 새것 같은 단어였다. 새내기 환영회 자리에서 한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얘들이 새내기면 우린 이제 헌내기야?" "아니지. 우리는 정든내기지." 정든내기라. 그 말이 참 좋았다. 대학생들은 이런 근사한 생각을 하는구나. 새것의 반대가 꼭 헌 것이어야 하나. 정든 것일 수도 있지. 그때부터 나만의 사전에서 '새'의 반의어는 '정든'이 되었다.


홍인혜 <고르고 고른 말_헌 몸과 정든 몸>


​​




엄마가 이사한 작은 빌라에서 부스스한 상태로 일어난 아침이었다. 나보다 먼저 깬 작은 언니가 요가 매트를 펼쳐놓고 무언가를 재생하려던 참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한혜진의 운동 동영상이었다. 작은 언니로 할 것 같으면 20년째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인 동시에 흥 넘치는 애주가로 입으로는 늘 다이어트를 외치는 후덕한 몸의 소유자다. 언니의 모습을 관망하며 훈수를 두다. 성화에 못 이겨 매트 위에 서서 몸을 움직이니, 자세를 바꿀 때마다, 뚝뚝 소리를 내며 관절이 존재감을 알렸다. 언니도 나와 마찬가지로 깔깔거리며 웃다가 잠깐의 운동에도 땀이 나는 걸 보니 역시 쉬운 게 없다며 적당히 합의한 후 매트를 접었다.​


집에 갈 때 챙겨간 홍인혜 작가의 「고르고 고른 말」에서 발견한 문장이 하필 <내 몸은 더 이상 최신품이 아니었다>는 어찌 보면 자조적인 메시지라니, 나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참인데 이것 참 마음이 통했다고 해야 할지.​


나는 무릎의 과거를 안다. 십 년 넘게 달리기를 좋아했던 몸의 주인을 만나 달리다 보니 점점 잘하게 되어. 흥이 난 김에 하루에 십 킬로 이상 달렸을 뿐. 순서를 밟듯 마라톤을 하게 되었고, 하프를 시작으로 풀 마라톤까지 달리다 보니 성취감까지 따라와 어느새 계산 불가능한 킬로수를 뛰었을, 하물며 주사와 물리치료를 병행하고 침을 맞으면서도 달리기를 놓지 않던 살짝 미친 인간이 몸의 주인이었다니, 과거로 돌아가 정신 차리라고 나의 명치를 치고 싶지만 각설하고. 언니와 내가 투덕거리고 있을 때. 그 자리에서 우릴 보며 웃던 엄마가 "관절엔 ooooo"라며 아침에 일어나는 게 다르니 나도 먹으라는 거였다. 별안간 엄마에게 약을 추천받아 인터넷을 검색하며 조금 서글퍼졌지만, 작가의 말처럼 헌 몸이 아닌 정든 내 몸을 위해 무릎 보호대를 하고, 흙 맛이 나는 쇠무릎 차를 마시며 어쩌다 달리기, 매일 스쿼시를 하는 요즘이 썩 나쁘지 않아. 어제 언니와 나의 한혜진 따라잡기는 어버이날을 앞두고 선뵈는 몸치들의 재롱 잔치쯤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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