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은 필터 작동 오 분전의 시간.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몸, 역할의 옷은 옷걸이에 걸려 있다. 투명하고 무방비한 의식 속에 아직 아무것도 해석되지 않은 세계를 마주한다. 펼쳐 놓았지만, 읽지 않은 문장은 그래서 오 분전이다.
우선 커피를 위한 필터를 사용한다.
5,4,3,2,1…… ON AIR
글은 필터가 없다. 말도 안 된다 여길 것이다. 정제되었을 거란 착각 때문이다. 일기를 쓰는 순간에도 나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허세와 거짓을 양념처럼 뿌렸으니 가면 뒤에 잘 숨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말로 대화할 땐 표정, 억양, 분위기 같은 사회적 완충장치가 함께 작동한다. 감정이 지나치게 드러나기 전에 숨 고를 틈이 있고, 상대의 반응을 보고 속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글은 오히려 이런 장치가 전혀 없다. 오직 내면과 언어만 맞닿아 있는 상태다. 그래서 문장은 단단한 듯 보이지만, 실은 가장 벌거벗은 상태다. 생각과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투명한 피부 같은 것.
이것은 아름다우며 동시에 위험하다.
글로 연결된 관계에서는 서로의 깊은 층을 너무 쉽게 들여다보게 된다. 얼굴도 모른 채, 감정의 핵심이 먼저 닿아버린다. 글이 가진 친밀함은 종종 과도한 진실성으로 작용하여 준비되지 않은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해버리게 된다.
글을 쓰면 쓸수록 이 무필터의 진실성을 다루는 기술이 중요함을 느낀다. 감정이 흐를 통로를 스스로 설계하는 일이 필요해졌다.
나만의 필터, 내가 만드는 정화장치.
내겐 그것이 책이었다. 그때의 책은 생각을 걸러내는 필터로 쓰인다. 혹은 컬러렌즈, 어조코팅, 감성조명 같은 완충장치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직도 글은 내게 노출의 극단적인 형식이고, 그래서 과도한 노출은 통제 불능처럼 느껴진다. 필연적으로 책은 다른 이의 언어를 통과한 표현의 매개일 수밖에 없다. 타인의 언어로 나 자신을 여과하는 생존법에 가깝다. 여기서의 노출은 사생활의 공개가 아니라 밑천을 다 드러내는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소재를 이리저리 활용해 오밀조밀한 세상을 설계하는 것에는 영 재주가 없다. 그래서 감각을 단어로 옮기고, 순간 채집된 생각을 다듬는 방식으로 글을 이어간다. 기억의 재구성으로 만든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감각의 조율에 의존한다. 그러면서 글쓰기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저만치 밀어둔다. 마치 그건 내 일이 아니라는 듯.
드러내고 싶으면서 드러나는 것이 두렵다. 표현과 여과의 경계 사이에서 외줄을 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수능 전날>이라는 주제를 밀쳐두고, ‘이건 이런 느낌 같기도 해’의 굴레에 갇혀 있다. 정리를 해야, 써 버려야 해소될 갈증 같은 것이라 쓴다.
어떤 이에게 글은 진리를 전달하는 도구이고, 어떤 이에게는 세계를 잠시 변형시키는 놀이며, 생각이 흘러가는 통로일 뿐이다. 단어를 배열하며 잠시 다른 세상을 만든 뒤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까지를 즐긴다. 머물고, 흔들리고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는 글쓰기.
‘결국’이란 부사를 잘 쓰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끝까지 살아남아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하찮은 결의 같은 것이다.
유용한 것이 살아남는 세상에서 무용한 것으로 글을 짓는다는 것은 가장 소용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무용함 속에 오래 머물고 싶은 이유는 어쩌면 발악일지도 모르나, 쓸모가 없는 문장은 세상과 거래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으면서도 무언가 살아 있음을 기록할 뿐이다.
오늘은 수능 끝난 동동이와 2주간 무용한 짓을 하겠다는 말을 이렇게 길게 써보았습니다. 학부모들에겐 1년간의 긴 명절 같은 날들의 마지막이겠으며, 아이들에겐 집단 쇼생크 탈출을 감행하는 순간이겠네요. 고3이라는 시간은 결과를 위한 준비로 채워져 있기에 가족 모두 마음속에서 끝나지 않는 명절을 치르는 셈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수능 이후의 해방감을 잠시 누리겠죠. 그 낯선 자유를. 끝났음에도 허무와 방향상실은 기정 사실이겠지만, 그래도 함께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나누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한 밤중에 토막이라도 내서 올리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애정하는 분들 글은 읽을 겁니다. 요즘 아침 독서가 작가님들 글로 대체 중입니다. 저와는 달리 한결 같은 분들 항상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