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스테파노 작가님께
가까운 친척부터 먼 친척까지, 한 사람씩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암은 위에서 시작해 전이되었고, 결국 온몸으로 퍼졌다. 진단 후 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나보다 더 적은 나이인 마흔다섯에 세상을 등졌다. 그때 “1년만 더 살게 해 달라”라고 말하던 아버지의 음성은 아직도 남아있다. 표정도, 목소리도, 그날의 상황도 또렷하지 않다. 그러나 그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첫째 삼촌과 둘째 이모는 폐암으로, 막내이모는 뇌종양으로 투병하던 시기에 언니 역시 폐암4기 진단을 받았다. 부모님의 형제자매 둘 중 하나는 암에 걸리는 러시안룰렛보다 더한 확률이었다. 언니와 나, 둘 중 하나는 암에 걸릴 수밖에 없는 구조 안에 서 있는 듯했다.
난 위로가 사치인 곳에서 말을 지폐보다 아끼게 되었다. 성급히 주머니 속 말을 꺼내기보다는 의자를 가져와 곁에 앉는 사람이 되려 애쓰게 되었다. 말 대신 시간을 쓰고 싶었다. 시간과 수고가 쓰인 자리에는 마음이 깃든다는 것을, 누군가 떠난 뒤에야 더 깊이 알게 되었다. 떠난 뒤에 남겨진 기억과 깊어진 마음이 온전히 혼자만의 것임을 알게 되었지만 괜찮았다. 감정은 겉으로 흘러나오지 않은 채 안에 쌓였고, 무엇이 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견딜 수 있다는 것만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연결성은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인간이 갖게 된 본능일 수 있다. ‘나’는 사라지지만 관계는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죽음은 견딜 수 없는 공백이 된다. 그래서 인간이 지닌 이 특이한 감각은 더욱 소중하다. “내 몫까지 살아달라”는 마지막 말, “뒷일을 부탁한다”는 말은 책임의 전가가 아니다. 그것은 사라짐 이후에도 관계가 계속된다는 것, 연결성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강한 믿음이다.
월요일 아침, 박 스테파노 작가님의 <사라짐에 대하여>를 읽으며 물밀 듯 밀려오는 기억 속 ‘시간’을 쏟아낼 공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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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작가님의 사유는 장석주의 ‘빨래와 비누’를 통과하며, 사라짐이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완성’에서 ‘이행’으로 초점을 이동시킴으로써 기꺼이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언급한 장 보드리야르의 문장은 머리가 시릴 만큼 더 깊게 다가온다.
모든 사물은 인간의 물리적 한계와 정서를 담고 있다. 그런 이유로 기차는 ‘인생의 시간 그 자체’를 함께 다루는 사물이 되고, 그 출발은 이유는 달라도 우리의 마음을 두서없이 뛰게 만든다. 그래서, ‘이 시간과 공간을 같은 무게로 통과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침묵이 겹쳐진다.’는 문장은 연결된 감각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내가 시간을 함께 보낸 아픈 이들은 점점 투명해졌다. 세상을 비추는 맑은 물처럼, 마치 진리를 투과하는 창처럼 그렇게 투명해졌다. 그래서 작가님이 쓴 ‘우쭐’이란 단어에 미소가 지어졌다. 우쭐함에는 과시가 아니라, 스스로를 비워낼 줄 아는 겸손함이 깃들어 있고, 곁에서 말 대신 시간을 쓰는 이들에 대한 신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가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