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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Feb 04. 2021

법정상속인과 정서적 상속인


아직 미혼인 중년을 만나는 게 어렵지 않다. 이혼남이나 이혼녀를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리고 재혼 가정 혹은 이혼 후 동거 중인 사람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떠오른다. 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사별 후 재혼하는 황혼 재혼도 이제는 당연시되어간다. 황혼 이혼도 많고 황혼 동거도 늘어나고 있다. 이 몇 줄 안 되는 내용 안에 열거된 가족의 형태가 단순히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굳이 그 가족의 구성원이 되어보지 않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가족의 단위를 친인척으로 확대했을 때 그 구성원이 아닌 사람도 찾기 힘들다.



예전에는 때가 되면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아주 큰 결격 사유가 없다면, 아니 술주정, 도박 등의 큰 결격 사유가 있더라도 가정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혼을 하고 그 배우자로부터 자녀를 생산하고 그 자녀를 같이 키우다가 가족의 구성원이 사망을 하게 되면 보험금의 수익자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가 된다. 부모 중 한 사람이 사망하면 그 배우자와 자녀, 그리고 자녀가 사망하면 그 부모가 상속인이 된다. 이 기준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 혹은 거부감을 느낄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어떠한가? 이혼남이 혼자 살고 있다가 재혼을 약속한 상태에서 암으로 투병 중 사망하게 되면 늙은 부모 대신 몇 년간의 병구환은 약혼녀가 했지만, 사망 후 모든 보험금은 연락 끊고 지내던 전처의 자녀 혹은 망인의 부모가 법정상속인이다. 이렇게 되면 약혼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과 동시에 그 사람을 돌보던 삶 이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리스크를 모두 떠안게 되지만,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다.



이럴 때 법정상속인은 부모 또는 자녀가 되는 게 당연하지만 약혼녀가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망인이 떠나기 전에 뭔가 조치를 해놨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런 경우의 약혼녀 같은 사람을 정서적 상속인이라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약혼녀의 주변인들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이게 정말 맞는 거냐? 어쩔 수 없는 거냐?”



그를 마지막까지 지킨 약혼녀야말로 망인의 사망보험금을 수령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뭐, 우리 생각으로야, 일부라도 위로금으로 보험금 일부를 법정상속인이 나누어주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10원도 주려 하지 않고 오히려 혹시 가족들 모르게 약혼녀에게 남겨진 것이 있을까 싶어 찾아내려 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정서적 상속인은 대부분의 경우 법정상속인에게 포용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겪으면서 손해사정사로서 사망 건을 만나게 되면 보험금의 수익자가 어떻게 될지를 항상 검토하게 된다. 그리고, 법정상속인의 현실과 정서적 상속인에 대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힘들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접한 사례로는 조카가 교도소에 수감 중인 아들을 대신하여 치매와 우울증에 걸린 이모를 10년 가까이 돌보다가 이모가 사망하였는데 그 보험금 지급 심사 과정에서 아들이 호적상 있는데 조카가 대리인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서류발급을 거부해 난항을 겪기도 하였다. 다행히 수익자를 조카로 지정해놓아서 어려움 끝에 조카가 많지 않지만 보험금을 수령하였다. 만약 법정상속인으로 지정되어 있었더라면 그 보험금은 교도소에서 언제 나올지 모르는 아들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조카는 피가 섞인 정서적 상속인이었으니 지정이 가능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정말 많다.



가족형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가 안착된 유럽의 경우는 보험금을 호적상 관련이 없는 법적 타인에게도 수익자를 지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법정후견인 제도가 잘 발달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당사자가 사회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심각한 결격사유가 있을 때만 후견인을 지정하도록 되어 있지만 이는 앞으로 반드시 변화가 요구되는 사항이다. 전통적 가족의 형태가 붕괴되고 법률로 담을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양산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유사시를 대비해서 후견인 제도가 좀더 열린 기준에서 활성되고 활용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률상 가족이 아니더라도, 그 피보험자가 원한다는 전제하에 그 조건에 대한 심사기준을 마련하여 정서적 수익자를 포용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뀐다면 종신보험의 판매 한계에 부딪힌 생명보험사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될 거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사망보험금에 대한 도덕적 해이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문제라서 간단하게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아젠다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와 더불어서 후견인의 자격심사 기준을 현실성 있으면서, 엄격하게 마련하는 등의 적극적 대안 마련도 동시에 이루어져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한 평범한 개인으로서 원하는 것은 내 삶의 끝에 법정상속인과 정서적 상속인이 같기를 바래본다.







이수현 손해사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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