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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Mar 05. 202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하기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와 시장경색이 지속되고 있다. 다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코로나19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와 얼마나 받았는지, 2021년에도 끝나지 않을 싸움을 어떻게 해나갈지를 고민하고 있다. 눈에도 안 보이는 이 미세하지만 거대한 적을 상대로 심리적으로 체력적으로 싸우고 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언택트 활동을 위한 프로그램들은 대박이 나고, 배달업체와 가구업체들은 유례없는 상승세를 달리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전체 카드 소비량은 크게 감소한 바가 없다고 하니 우리 주변에 망해나간 ‘임대구함’의 자리를 누군가가 분명 대신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코로나 불경기로 보험 유지가 어려운 고객도 있지만 새로운 부의 창출로 새로운 재정 위험관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보험업계는 낯선 사람을 만나기 꺼리는 분위기로 인해 소개영업이 막혔을 뿐 아니라, 주요 만남 장소인 카페가 착석금지가 되면서 그나마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더욱 축소되어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보험사는 사람들의 대외활동이 차단되면서 교통사고나 야외활동 중 사고가 현저히 줄어 손해율이 매우 좋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사고의 감소는 골절환자 수술실 운영이 주요 수입원인 정형외과 병원을 깊은 시름에 잠기게 하고 있고, 이에 파생되는 간병인이나 의료기업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손해사정업계도 코로나19에 대한 염려로 피보험자들이 보험조사원을 만나기를 기피하여 심사 지연이 심해지자 심사자들이 직접 피보험자들과 소통하고 있어서 일명 서베이라 불리는 보험금조사 외주업체들의 일거리도 매우 급감하고 있다. 그래서 이수현은 어떻냐 물어보고 싶을 것이다. 조사업체들이 느끼는 한파가 상대편이라고 해서 덜하랴.



나에게 코로나19와 함께 찾아온 2020년은 오히려 멈춤으로 많은 생각의 계기가 되어주었고 새로운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위기감 속에 처절한 고민의 끝은 결국 새롭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었고 어떤 새로움을 추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민과 시도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



그러나 고민을 할수록 전혀 새롭지 않은 사실 앞에 고민이 더욱 깊어진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만나고 싶은 사람인가?”



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을 뚫고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인가? 영상통화를 통해서라도 얼굴을 보고 싶은 사람인가? SNS을 통해서라도 소식이 궁금한 사람인가? 코로나19라는 이 상황에서 꼭 도움이 되어주는 사람인가?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에서 나와의 만남이, 나의 목소리가, 나의 메시지가 그들에게 욕구이기 이전에 따뜻함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인가? 반가움인가?



결국,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살아남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워야 하는 대상이 될 수 있느냐가 생존의 지표인 것이다. 거리두기는 필요하지만, 밥은 먹어야 하니까 배달은 필요하고, 집에 오래 있어야 하니까 가구가 중요해지고, 코로나19니까 반드시 꼭 만나야 할 당신에게 시간과 곁을 내줄 수 있는지,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귀한 만남의 가치에 대한 고민은 전혀 새롭지 않으나 그 가치가 점점 고양되어가는 사회로 변화되어 가고 있음에 대한 깨달음은 코로나19가 가져온 낯선 사실이다. 이 낯선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고객의 만남은 원하면서 그 만남을 귀히 여기지 않는 모순에 의해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실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남편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자주 강요한다. 당신은 내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주름살이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쁘다고 해야해. 내 바지 사이즈가 한참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날씬하다고 해야해. 내가 60이 넘어도 나한테 귀엽다고 말해야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야 말로 진정한 사랑과 배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이제 거의 세뇌 수준에 이르러서 마치 버튼을 누른 듯이 내가 원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일정한 톤으로 읊어낸다. 남편에게 세뇌된 것은 대답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답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 최상의 컨디션을 제공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는, 당신은 누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극복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나를 만나기 위해, 나와 소통하기 위해, 나를 알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극복할 존재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찾아내고 만날 것인가? 당신은 정말 그런 가치가 있는가? 그들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 전혀 미안하고 부끄럽지 않은가? 오늘 당신이 만날 사람은 사회적 거리두기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쓰고 대화하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당신을 아직 잘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만나기로 결정했는데 그들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 나타난 당신은 그들에게 어떠한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가?



기억하라. 우리의 만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극복해낸 결과라는 것을.





이수현 손해사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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