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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Apr 19. 2021

보험의 언어 ‘보며들기’


 ‘언어의 온도’라는 책을 선물받았다. 또 ‘리더의 언어’라는 교육과정의 등록을 권유 받았다. ‘보험 용어’에 관한 칼럼 연재 의뢰도 받았다.


한 회사의 웹진 담당자로부터 의뢰받은 칼럼에 대한 논의하는 과정에서 ‘보험 용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보험 용어는 ‘피보험자’와 ‘계약자’ 같은 약관 혹은 보험상품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용어였는데 의뢰인 측은 ‘보험에 관한 시사용어’를 보험 용어로 이해하고 있었다. 보험 생활 16년 차 나의 언어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예전에 직원이 사무실 냉장고를 열어보고 “치즈 빨리 드셔야겠어요. 납입기간이 끝나가요?”라고 했다. 나는 그 어색한 표현이 이해됐다. 그렇다. 나는 유통기한이라는 단어보다 납입기한이 더 익숙하고 친근한 보험쟁이다. 내가 하루 중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뭘까? 하루 동안 가늠해보았다.

첫 번째는 ‘담당자님’이다. 보험사 심사자나 현장조사 담당자들의 각자 직책을 정확히 기억하기 어렵고 자칫 실수할 수 있어서 그렇게 부른다. 종일 여러 피보험자의 여러 회사의 담당자들과 통화하면서 얼굴을 본 적 없어도 나랑 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는 그 사람들을 나는 담당자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담당자님들은 나를 ‘소장님’이라고 부른다. 아마 그들에게는 내가 고른 담당자님이라는 호칭처럼 가장 적당한 호칭이 소장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두 번째는 ‘피보험자’다. 담당자들과 통화하면서 피보험자의 입장 및 의견을 전달하기에 피보험자는 우리의 대화에서 백화점의 ‘고객님’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 

세 번째는 ‘보험’. 종신보험, 상해보험, 운전자보험, 실비보험 등 보험이 첫 번째여야 하는 게 아닌가 싶겠지만 담당자들과 통화할 때는 다투어야 할 쟁점이 이미 정해진 상태라 상품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보험이라는 단어는 설계사나 일반소비자들과 상담할 때 ‘보험증권’, ‘보험금 지급기준’, ‘보험약관’ 등이라는 표현에 녹여 많이 사용하게 된다.

그 다음은 ‘진단서’이다. 이 단어는 호칭처럼 반복해서 사용하지 않지만 대화에 감초처럼 꼭 들어간다. 암진단금 같은 질병의 진단을 지급사유로 하는 경우뿐 아니라 상해보험에서도 진단명을 확인하기 위한 진단서는 보험금에 있어 필수 서류이기 때문에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날은 출근을 안 한 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담당자, 피보험자, 보험, 진단서…그리고 또 손해, 사고, 지급….등등 나는 이런 단어들 속에서 살아간다. ‘언어의 온도’에서는 사람의 언어는 온도차가 존재하고 그 온도가 주는 변화는 중요하고 큰 것이라고 했다. ‘리더의 언어’의 교육자는 언어가 우리가 하는 업무를 달라지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웹진의 광고주는 ‘보험(시사) 용어’가 쉽고 객관적으로 이해되어지기를 원했다. 언어는 온도가 있고, 무언가를 달라지게 하는 힘이 있고,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는 객관적 혹은 주관적인 이해의 정도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온도로 표현한다면 보험설계사를 했던 70차월은 뜨거워서 타죽을 것 같았고, 손해사정사로서 보낸 10년은 너무나 차가웠다. 고객의 결정을 유도하는 설계사의 언어를 쓰던 나는 과정과 결정에 명확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색했다. 진심을 다해 쏟아낸 많은 설명들은 불필요한 정보나 오해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나는 어떤 언어에 이끌려 이리 오랫동안 ‘보험의 언어’ 속에서 살고 있는가? 나는 왜 그 세월 동안 ‘보며들어’(보험에 스며들어) 아들이 매일 먹는 우유의 유통기한보다 보험 납입기간이 더 익숙한가. 뜨겁거나 차가웠던 온도 속에서 나를 계속 이곳에 머물게 한 ‘보험의 언어’는 그 식상하고 촌스럽고 구태의연한 ‘사랑’이었다.
지금은 보험을 판매하면서 가족 사랑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내가 한참 설계사로 근무하던 시절 종신보험 가입 안 하는 ‘가족 사랑 없는 가장’은 나쁜 사람이었다. 반드시 종신보험일 필요는 없지만 사고 시를 생각하지 않고 보험에 미가입한 가장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함없다.

일하면서 가장 크고 오래가는 욕 폭탄이 터진 때가 세 번 있었는데 ‘가입 이후 2년을 불과 며칠 남겨두고 자살한 가장’의 가족을 만난 이후였다. 가족들 위해서 며칠만 참을 것이지 온전히 본인 생각만 한 것 같아 화가 치밀었다. 잘 알고 있다. 보험금을 줘야 하는 이유를 요목조목 적은 사정서를 제출한 나는 담당자님들한테 손해율을 올리는 사람이다.

심지어 사정서는 첫 페이지랑 청구금액만 봐서 마지막 장에 남긴 내 연락처를 못 보고 왜 연락처를 안 남기냐고 하는 담당자님도 있다. 담당자님들도 잘 안다. 나는 객관적이지 않다. 피보험자 편이다. 피보험자가 보험금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 가끔은 내가 피보험자 편이 아니라 피보험자와 보험사기 공모 수준의 뭔가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피보험자를 만나기도 한다. 담당자님도 나도 알고 있다. 우리 모두 가족을 위해서 일한다. 피보험자도 가족을 위해서 보험을 가입했다. 우리 모두 사랑한다. 그렇다. 우리 모두 ‘보며든’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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