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와이잭

노래 한 곡이라는 핑계

<비포 선셋> / 니나 시몬 'Just in Time'

by 요지


스무 살에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1994)>를 봤다. 일시정지, 재생, 일시정지, 재생을 정신없이 반복하고 계속되는 하품 세례를 꾹꾹 참아가며 간신히 엔딩 크레디트를 보며 이런 영화를 다시 보는 일은 없을 거라 다짐했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비엔나의 거리와 상점을 돌아다니고, 끝없이 수다를 떨다 밤을 함께 보내는 ─ 젊다는 표현보다 어리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두 남녀의 치기 어린 사랑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한 편으론 시시했고 또 한 편으론 지루했다. 그 나이의 사랑이란 원래 그렇게 충동적인 거 아닌가라는 생각과 함께. 그래, 그땐 몰랐다. 그게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동화였는지를.


시간은 흘러 스물아홉, 강산이 변할 정도의 나이를 더 먹고 나서야 후속작인 <비포 선셋>을 봤다. 모두가 다 좋다는 선라이즈를 반 졸면서 봤던 내게 그 뒷이야기는 아무래도 상관없었기에 ‘전 편의 감동이 깨질까봐 후속은 못 보겠다’는 알량한 핑계를 대며 꾸준히 보기를 미뤄왔다. 그러던 중 도플갱어 수준의 취향을 가진 G언니가 다시 한번 추천했는데 거기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선라이즈랑 달라. 선셋은 완전 네 스타일이야.”


그 말은 쐐기골 같은 것이었다. 내 취향을 꿰고 있던 (그럴 수밖에. G언니의 취향과 내 취향은 완전 판박이다) 언니의 말에 나는 속는 셈 치고 영화를 틀었던 것이다.



ⓒ 네이버 영화


그 결과는 이렇듯 식상하다. 80분도 채 안 되는 영화에 거의 주인공이 되어 웃다, 우울해졌다, 흐뭇해지길 반복했다. 한 번 더 보고, 또 한 번 더 봤다. 그리고 그 영화로 글을 쓰고 있으니 말 다했다. 스물셋, 평생 잊지 못할 하루를 보냈던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는 그로부터 9년 만인 서른둘이 되어서야 다시 만난다. (우연처럼 내가 '선라이즈'를 보고 '선셋'을 보게 된 시간과 같다!) 뉴욕과 파리라는 각자의 위치, 베스트셀러 작가와 환경 운동가라는 각자의 직업, 한 아이의 아빠와 종군 사진기자의 여자 친구라는 각자의 사랑을 가지고. 서로를 소울 메이트라 자부하던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은 이제 단 두 가지뿐이다.


‘함께 늙어가는 처지’와 ‘젊은 날의 아름다운 기억’


사랑이라 말하긴 너무 찰나였고, 그리움이라 말하긴 너무 옛 일이 되어버린 감정 앞에서 둘은 그저 이 말만 되풀이한다. “다시 만나게 돼서 너무 좋다."


사실 ‘전편과 다르다’ 던 G언니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영화나 영상기법 면에서, 혹은 내용면에서 전편과 크게 변한 건 없었다. 아니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전편에 비해 배경이 되는 장소는 매우 협소해졌고, 두 주인공이 함께 지내는 물리적인 시간도 짧아져 하마터면 ‘인생에서 가장 성의 없었던 영화 Top 3’에 들 뻔했다. 하지만 공통점은 차츰 사라지고 각자의 사정이란 게 생긴 만큼 공유하는 시간과 장소도 줄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한층 더 매력적이게 만들었다.



ⓒ 구글 이미지


그러나 이 영화가 내 스타일이라고 확신하게 된 건 마지막 장면 때문이었다. 제시의 비행기 시간 때문에 무엇 하나도 시원스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30대의 두 사람은 9년이란 시간을 체감하듯 러닝타임 내내 매우 현실적인 태도를 취한다. ‘추억은 과거를 감당할 수 있을 때 아름답다’는 명언도 쿨 하게 내뱉으며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은 다시 스물셋이 된다.


정확히는 촉박한 비행기 시간에도 아랑곳 않고 노래 한 곡을 핑계로 셀린느의 아파트로 들어선 제시가 선반에서 집어 든 음반을 플레이하게 되면서. 피아노와 일종의 탬버린 악기로 만든 정통 재즈 반주에 곧이어 굵고 농염한 목소리가 그루브를 타며 흘러나온다.


바로 니나 시몬의 ‘Just in time’이다.


니나 시몬에 대한 정보가 일절 없던 나는 목소리만 듣고 남자인 줄 알았다가 깜짝 놀랐는데 이 재즈계의 대모는 알고 보니 마이클 부블레Michael Bubbled가 부른 ‘Feeling good’ 원곡자. 메이저와 마이너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녀는 극 중 셀린느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묘사되는데, 그 모습을 따라 한답시고 입술을 한껏 내밀고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어대는 셀린느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꽤 사랑스럽다. 그리고 그 사실은 로맨틱하게 바라보는 제시의 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전히 리듬을 타며 비행기 놓치겠다 말하는 그녀에게 “I know(나도 알아)”라고 답하는 마지막 순간은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완벽하다.


제시가 비행기를 타든 안타든 그건 중요치 않다. 니나 시몬의 노래 제목처럼 둘의 시간은 ‘바로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선라이즈’는 이상적, ‘선셋’은 현실적이라고 무 자르듯 단정 지을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푸른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처럼 현실 속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꿈같은 감정, 그건 내가 일명 ‘비포 시리즈(Before sunrise, Before sunset, Before midnight)’를 사랑하게 된 이유기도 하다.



와이잭, Vol.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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