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와이잭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삼거리 극장> / '정든 꿈'

by 요지


대학 새내기 시절 사진 동아리 활동을 한 적이 있다. 민망할 정도로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곳은 요즘 보기 드문 '필름 카메라'를 사용했고 심지어 직접 현상과 인화까지 해야 했는데, 고작 핸드폰 카메라와 부모님을 졸라 구입한 작은 디카가 전부였던 내겐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다. 들어가 입회원서를 쓰자마자 바닥에 쪼그려 앉아 현상액(필름을 릴에 감아 현상할 때 붓는 혼합액)을 만들었던 기억까지도 생생하다.


하지만 이 동아리만의 메리트는 따로 있었는데 그건 오직 흑백 필름만 이용한다는 것. 처음 두 롤을 제외하곤 필요 한만큼 스스로 구입해야 했기에 스물한 살의 나는 충무로와 종로 3가 필름상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구입할 수 있는 흑백 필름의 종류는 눈에 띄게 줄어갔다. 맨 처음 쓰던 필름은 생산을 중단했고, 그나마 몇 개의 감은 필름을 구입해 써야만 했다. 그러나 그 조차도 곧 단종되어 결국 저렴하지만 까슬까슬한 느낌의 새로운 흑백 필름에 적응하던 중 동아리를 탈퇴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나왔으나 이미 흑백 필름에 매료된 나는 그 후에도 종종 쓰다 남은 흑백 필름으로 사진을 찍곤 했다. 하지만 흑백 필름을 다루는 현상소를 찾는 데서 또 한 번 난관에 봉착했다. 기껏 찾아간 충무로 사진관은 나의 예술 세계를 무시하고 고작 열 장 남짓의 사진만 손에 쥐어줬고 여전히 결과물을 확인하지 못한 필름들만 내 방구석에서 뒹굴 대고 있다.

‘취급하지 않는다’는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그때 알았다.
취미도 마음대로 갖지 못하는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조금 서럽기까지 했다.


삼거리극장_1.jpg ⓒ 네이버 영화


영화의 제목이자 주 무대인 <삼거리 극장>은 딱 흑백 필름 같다. 물론 많이 낡았으나 현재까지 상영작도 있고 (무려 2개나), 경리부터 영사기사까지 필수적인 직원도 있을 정도로 꽤나 구색을 갖춘 극장 이건만 아무도 취급하지 않는다. 언급되진 않았으나 아마도 현재의 청년들은 도시의 멀티-플랙스 극장에서 최신 영화를 즐길 테고 삼거리 극장을 이용하던 옛날 청년들은 이제 영화관에 올 힘도 남지 않았거나 혹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여전히 존재하지만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는 그곳에 남은 건 극장 주인인 우기남(천호진)과 밤이면 출몰하는 귀신들뿐이다. 아니, 한 명 더 추가하자면 삼거리 극장에 간다며 집 나간 할머니를 찾아온 소단(김꽃비)까지. 당연히 그들에게 들어온 극장 폐관 요구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허탈했을 뿐. 특히 소단에게는 더욱 그랬다. 삶의 의미도 의무도 모른 채 되는 대로 살아온 그녀에게 극단은 새로운 의미이자 책임이었다. 그리고 즐거움이었다. 그녀의 삶에 동정은커녕 “그냥 춤이나 춰!”라고 외쳐주던 귀신들에 대해 두려움보단 동질감을 느껴가던 참이었으니까. 어떤 공간에 그리고 존재에 처음으로 정이 든 소단에게 폐관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아직 할머니를 찾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삼거리극장_2.jpg ⓒ 네이버 영화


그 마음은 ‘정든 꿈’이라는 곡에 그대로 담았다.


영화는 독특하게도 뮤지컬 형식을 가져왔는데 그래서 배우들의 감정선이 훨씬 더 피부로 다가온다. 특히나 이 노래는 어떤 상황에서도 강렬하고 신났던 앞의 곡들과는 전혀 다르다. 너무나도 차분하고 담담한 데다 아주 서정적인 노랫말까지. ‘이 세상 정들 데 없어 꿈에 정드네’라는 가사만 봐도 그렇다. 부르며 연기하는 배우들보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가 더 마음이 허해졌달까. 그리고 사라지는 것들이 머릿속 가득 떠올랐다. 흑백 필름, 공중전화 카드, 우표, 책갈피, 연필 같은 것들. 지금은 하찮고 쓸모없어 보이나 누군가 에겐 야망이었고, 로망이었고 또 소망이었을 모든 것에 대해.


이 키치한 영화는 <비틀쥬스Bettle Juice><록키 호러 픽쳐쇼The Rocky Horror Picture show>같은 약간 특이한 색깔의 작품들과 동시에 언급되곤 한다. 그렇지만 사실 <삼거리 극장>은 그 옛날 영화들보다 더 가진 게 많다. 한국적인 정이나 아날로그를 마주하는 ‘치명적인 현대인’의 모습 같은 것들. 그래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감독의 애정 어린 시선에 더 괜히 마음이 간다. 음산한 배경음악을 깔아도 그 따뜻함은 감히 숨겨지지 않는다.




와이잭, Vol.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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